길을 걸으면 사유의 싹이 튼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고, 길을 걷는 이유 중 하나다. 직접 여행을 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여행을 통해 얻은 사유를 엿보는 것도 묘미다. 이번주 그런 책이 여럿 나왔다.

[책마을] 사유의 씨앗 가득 뿌려진 여행길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전국역사지도사모임 지음, 유씨북스)는 종로, 명동, 용산, 영등포, 마포, 동대문 등의 길을 따라 서울의 근현대사를 되짚는다. 종로에 가면 여러 표석이 있다. 김수영 집터, 보성사 터, 우미관 터 등. 건물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자리지만 광복 이후 근대적 도시에서 현대적 대도시로 변해간 서울의 옛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명동 길에서는 일제 강점기 모던보이,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모였던 다방 문화와 명동 문화의 산증인인 소설가 ‘명동백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포 길에서는 붉은 벽돌을 만들던 연와공장 자리에 지어진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와 최초 화력 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를 살펴본다. 구로 길에서는 수출산업 메카이자 노동 운동의 성지인 구로공단을 둘러본다.

[책마을] 사유의 씨앗 가득 뿌려진 여행길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김경한 지음, 쌤앤파커스)는 유럽, 미국, 일본, 중국, 한국 등 세계의 도시를 걷는다. 공공미술의 천국 미국 시카고, 미의 절정이자 극복의 대상인 일본 교토의 금각사, 자연에서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영국 코츠월드 등이다. 자신의 눈으로 본 각 나라 여러 도시에 관한 인문학적, 역사적 이야기를 풍성하게 풀어낸다.

그저 유명한 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다. 건축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소설 《돈키호테》 《그리스인 조르바》 등 저자가 듣고 읽었던 음악, 미술 작품, 문학의 근거지가 되는 곳을 찾는다. 저자는 “여행은 사유에 양념을 풍성하게 뿌려주는 기막힌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책은 ‘멈춤’과 ‘휴식’을 선사하며 독자들이 ‘나만의 사유’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여행을 떠나도록 돕는다.

[책마을] 사유의 씨앗 가득 뿌려진 여행길
《마침내 런던》(헬레인 한프 지음, 에이치비프레스)은 미국 뉴욕의 영국 문학 독서광 이야기다. 20년간 영국 런던이 중고서점 ‘마크스 서점’과 책·편지·우정을 주고받던 무명작가 헬레인 한프는 영국 고전 문학을 최고로 치는 애서가다. 꿈에서라도 런던 거리를 거닐어 보고 싶어 했지만, 건강과 경제적 문제로 번번이 발목이 잡힌다. 그러다 마크스 서점과의 편지를 엮어낸 책 《채링 크로스 84번지》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평생을 기다린 런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런던 사람보다 더 런던을 사랑하는 저자가 영국 문학 속 런던 거리를 안내하는 여행기다.

[책마을] 사유의 씨앗 가득 뿌려진 여행길
《도망치고 싶을 때면 나는 여행을 떠났다》(박희성 지음, 프롬북스)는 겁 많고, 소심하고, 내성적이라는 20대 저자가 세계 20여 개 나라를 여행한 이야기다. 저자는 “어찌 생각해보면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여행을 떠난 셈이었다. 무너지는 댐처럼 멘탈에 조금씩 균열이 생길라치면 나는 여행을 떠났다”고 고백한다.

책은 여행기면서 성장기로 읽힌다. 여행을 통해 저자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경험을 한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회와 문화, 낯선 사람들과 만나면서 ‘가면 벗은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빤한 어른이 될 뻔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한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