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집시', 1897, 뉴욕현대미술관
'잠자는 집시', 1897, 뉴욕현대미술관
검푸른 하늘과 하얀 달 아래, 만돌린을 연주하던 집시 여인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곁엔 사자가 어슬렁거리고 있네요. 사자는 여인을 위협하기 보다, 왠지 지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딜까요. 외국 어딘가에 있는 사막일까요. 꿈 속일까요. 현실처럼 생생하게 와닿으면서도, 몽환적이고 기이한 환상 속에 있는 느낌도 듭니다.

이 독특하고 신비로운 그림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 앙리 루소(1844∼1910)가 그린 '잠자는 집시'입니다. 루소는 이 작품을 포함해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그림들을 다수 그린 화가로 잘 알려져 있죠.

그런데 이처럼 독창적인 작품을 그렸던 루소는 항상 비웃음과 조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라발 시장에게 '잠자는 집시'를 사달라고 요청하는 편지까지 직접 썼는데요. 라발 시장은 그림이 너무 유치하다며 무시했습니다.

비평가들도 그의 그림들을 보며 한참 비웃다 돌아서곤 했습니다. 이런 평도 나왔다고 합니다. "재밌는 루소 씨는 우스꽝스러운 장난감 인형같은 유치한 미술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앙리 루소의 자화상, 1903, 피카소미술관
앙리 루소의 자화상, 1903, 피카소미술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요. 루소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끝까지 고집했습니다.

최악의 혹평,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최고의 자신감. 강철 멘탈을 가진 루소의 삶과 작품 세계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루소는 인상파, 입체파, 야수파 등 다양한 양식 중 어디에 속할까요. 지금은 입체파의 선구자적인 인물로 꼽히지만, 오랜 시간 그는 '소박파'로 분류되어 왔습니다.

소박파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흔히 '소박하다'라는 말을 할 때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소박'의 사전적 의미는 '꾸밈이 없이 순수함 또는 수수함'입니다. 소박파를 영어로는 '나이브 아트(Naive Art)'라고 하는데요. 이 또한 '순진하다, 천진난만 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소박파는 특정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느낌대로 그려, 순수하고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화가들을 이릅니다. 하지만 주로 본업이 따로 있지만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한 사람들을 지칭했기 때문에, '아마추어 화가'라고 낮추어 말하는 뉘앙스도 약간 담고 있죠. 루소가 대표적인 소박파로 분류돼 왔으며 카미유 봉부아, 앙드레 보샹 등도 여기에 속합니다.
'꿈', 1910, 뉴욕현대미술관
'꿈', 1910, 뉴욕현대미술관
루소는 그중에서도 정규 미술교육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인물로 유명합니다. 순전히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죠. 루소는 대체 왜 미술을 배운 적이 없을까요. 그럼에도 이렇게 유명한 화가가 된 비결은 무엇일가요.

루소는 50살에 이르러서야 전업 화가가 됐습니다. 여기엔 안타까운 사연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 힘겹게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죠.

프랑스 북서 지방의 라발에서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5살 때 아버지가 파산한 이후로 늘 떠돌아다니며 돈을 벌어야 했죠. 고등학교도 중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중, 유혹을 참지 못하고 돈을 훔치다 걸렸습니다. 이후 그는 형을 줄이기 위해, 군대에 가서 7년간 복무하기로 자원했습니다. 정말 잘 되는 일 하나 없는, 잔인한 운명의 덫에 걸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극심과 고통과 새로운 희망은 동시에 찾아오는 걸까요. 그는 이곳에서 미술과 마주하게 됩니다. 군에서 심심풀이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 빠져들게 된 겁니다. 덕분에 화가의 꿈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탓에 전업 화가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루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5년 만에 군대에서 나왔지만, 곧장 취업을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세금징수소에 들어가 세무공무원이 됐습니다.
'열대 폭풍우 속의 호랑이', 1891년, 런던내셔널갤러리
'열대 폭풍우 속의 호랑이', 1891년, 런던내셔널갤러리
취업에도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말단 공무원들의 월급은 생계를 유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또 병에 걸린 아내와 7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 해서 매주 60시간 이상 일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문에 루소는 '일요 화가'라고도 불렸습니다. 평일엔 아예 붓을 들지도 못하다가, 일요일에만 시간을 쪼개 그림을 그리는 그를 주변 화가들이 조롱한 것이죠.

돈도, 시간도 없었던 탓에 루소는 모든 화가에게 있었던 미술 스승도 아예 두지 못했습니다. 그저 혼자 그리고 또 그렸죠.

그러다 40대가 돼서야 그림을 좀 더 그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됐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들을 모사할 수 있는 허가증도 얻었습니다. 그는 모사도 열심히 하며 어떻게든 좋은 그림을 그리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항상 벽에 부딪혔습니다. 루소 스스로는 자신을 사실주의 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보면 원근법, 비례 등이 모두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열대 폭풍우 속의 호랑이' '꿈' 등에서 원시 정글을 자주 그렸는데요. 이 작품들을 보면 풀들이 뻣뻣하게 우거져 있고, 대상들과 다소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현실과 환상을 가로지르는 듯 독특한 화풍이 탄생한 것이지만, 당시엔 비웃음을 살 뿐이었죠.

그가 인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형을 들고 있는 아이'를 보면 아이의 얼굴과 몸이 비례에 맞지 않고 표정도 어색합니다. 마치 만화 속 인물 같습니다.

'풋볼 하는 사람들'이란 작품도 사람들이 지나치게 크고 동작도 자연스럽지 않아서, 인형 그림을 잘라 붙여놓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루소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던 사람들은 그림이 인물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줄줄이 퇴짜를 놓기도 했습니다.
'인형을 들고 있는 아이', 1904~1905, 오랑주리미술관
'인형을 들고 있는 아이', 1904~1905, 오랑주리미술관
계속되는 조롱에 그는 슬픈 거짓말도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작품 속 원시 정글을 어디서 봤냐고 물어보면, 그는 주로 멕시코를 언급했습니다. 군대에서 멕시코 파병을 간 적이 있었고,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했다고 했죠.

하지만 그는 실제 한 번도 프랑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생계를 어렵게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갈 수 없었던 겁니다.

그가 정글을 자주 그렸던 이유는 식물원에 가서 이국적인 식물들을 보고 영감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상상을 더해 정글을 완성했죠. 하지만 이 얘기를 하면 더욱 놀림을 당할 것 같아, 그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잦은 굴욕에도 루소는 화풍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굳은 신념과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노력으로 얻은 나만의 자유로운 스타일을 바꿀 생각이 없다."
'풋볼 하는 사람들', 1908, 솔로몬 R.구겐하임미술관
'풋볼 하는 사람들', 1908, 솔로몬 R.구겐하임미술관
그리고 그는 마침내 50세가 돼서야 세관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가 됐습니다. 이후에도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했고, 60대에 이르러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콜라주 기법과 초현실주의 등이 탄생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죠.

1908년 당시 27살의 유명 화가였던 피카소는 파리 예술가들을 한데 모아놓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 64살의 루소를 위한 파티를 열어줬습니다. 루소는 파티에서 피카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입니다. 선생은 이집트 스타일에서 최고이고, 난 현대 스타일에서 최고죠."

말년에 이르러서야 활짝 웃으며 자신과 작품을 자신 있게 소개하고 뽐낼 수 있었던 루소. 그가 애잔하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어떤 굴욕에도 자신만의 신념과 확신을 지켰기에, 루소는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