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점-기사 '을과 을의 싸움'…"원청업체가 대리점에 책임 전가"
"악순환 끊을 상생안 시급"…CJ대한통운 "상황 지켜 보겠다"
택배기사는 과로사, 대리점주는 극단선택…암울한 택배 현주소
택배 기사들의 잇따른 과로사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세 아이를 둔 40대 택배 대리점주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점주는 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연대노조에 가입된 대리점 기사들의 업무 방해와 집단 괴롭힘으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고 유서에 썼다.

업계에서는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선 택배노조 설립 후 표면화한 대리점과 택배 기사 간 대립 구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 점주-노조 '구역 분배·수수료' 갈등 추정

지난달 30일 극단적 선택을 한 A(40)씨는 2013년부터 경기도 김포에서 CJ대한통운 택배대리점을 운영했다.

A씨는 장기동 일부 구역을 관리하는 동안 2차례 분구(택배 담당 구역을 분할)했다.

신도시 개발로 대거 들어선 아파트 단지의 일부를 떼어주는 형태였다.

올해도 대리점 소속 직원에게 3번째 분구를 할 계획이었으나 공개 입찰 문제와 해당 직원과의 견해차로 분구가 결렬됐다고 한다.

CJ대한통운 택배대리점연합회 관계자는 1일 "과거 대리점주가 직원에게 돈을 받고 택배 구역을 파는 등의 비리가 있어 CJ대한통운이 지난해부터 분구 시 공개 입찰 제도를 만들었다"며 "이 규정 때문에 분구를 쉽게 할 수 없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서에 분구로 인한 갈등을 언급한 A씨는 "(이후) 그들의 선택은 노조였다.

노조에 가입하면 소장을 무너뜨리고 대리점을 흡수해 파멸시킬 수 있어 뜬소문과 헛소문을 만들어내며 점점 압박했다"고 썼다.

A씨가 숨졌을 당시 이 대리점에 소속된 기사 18명 가운데 12명이 전국택배노조 조합원이었다.
택배기사는 과로사, 대리점주는 극단선택…암울한 택배 현주소
이들 조합원이 A씨에게 물품을 배송할 때 받는 수수료를 인상해달라고 요구하면서 갈등은 더욱 커졌다.

A씨와 기사들이 소속된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6∼8월)에는 '주5일제에 배송 수수료, 집하 수수료 인상 등 적정한 대우 받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합원 의견이 올라왔다.

기사들은 이 과정에서 일부 물품을 배송하지 않는 등 업무를 거부했고, A씨와 가족이 그 공백을 메우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카톡방에서는 사과하거나 살려달라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X소리 한다는 등 A씨에 대한 집단 비방도 이어졌다.

결국 A씨는 원청업체인 CJ대한통운에 대리점 포기 각서도 냈다.

포기 기한은 그가 숨지기 전날이었다.

전국택배노조는 전날 입장문을 내고 "기사들이 대리점에 수수료 정시 지급 문제를 개선해달라고 요청하다가 발생한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노조 관계자는 "월말에 지급할 수수료를 절반만 주고 보름 있다가 나머지를 주는 등의 지급 지연이 3년 이상 이어진 것으로 안다"며 "원인을 포함한 현장 실태와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선 고인의 발인이 끝난 뒤 밝히겠다"고 말했다.

◇ 결국 대리점-택배노조 간 대립 구도
택배기사는 과로사, 대리점주는 극단선택…암울한 택배 현주소
업계에서는 택배노조 설립 이후 점차 번지고 있는 대리점과 기사 간 대립 구도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앞서 고용노동부는 2017년 1월 전국택배연대노조가 출범한 이후인 11월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된 택배 기사들의 노조 설립을 허용했다.

당시 고용부는 택배 기사의 배송 업무가 사측에 의해 지정된다며 기사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에서도 택배 기사들이 노조를 설립할 수 있는 근로자라는 판단이 잇따라 나왔고,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노조는 얼마든지 단체행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택배 수수료를 나눠 갖는 대리점주들과 노조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재 원청 택배사들은 특정 지역에 대해 대리점과 도급계약을 맺고 대리점은 기사들과 위탁계약을 맺는 구조다.

특수고용직인 택배 기사들은 일하는 만큼 대리점이 책정한 수수료를 받는다.

노조 조합원인 기사들이 단체행동에 들어가 일을 하지 않더라도 대리점주들이 업무를 강제할 방법은 마땅히 없다.

전국택배연대노조 관계자는 "노조가 없을 때는 대리점주들이 기본 20∼30%의 수수료를 가져가는 등 무법천지였다"며 "노조가 생기고 이런 불공정한 근로 조건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불거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결국 원청업체가 모든 책임을 대리점에 전가하며 을과 을의 다툼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한 택배 대리점주는 "노조가 설립된 이후부터 기사들이 대리점을 일단 적으로 보는 듯한 구도가 형성돼 '내가 물건 안 갖다주면 그만'이라는 식의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며 "오래 이 일을 했지만, 이 상황이 계속되면 대리점을 그만둘 계획"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악순환을 끊어낼 상생안이 시급한 상황"이라며 "노조 측의 일방적인 단체행동 없이 수수료율 협상을 끌어내는 등의 협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원청업체인 CJ대한통운 측은 유족이 경찰 수사를 의뢰한 만큼 추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아직 장례가 치러지고 있고 경찰 수사가 의뢰된 상황이어서 어떤 입장을 밝히기가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