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장인에게 단도 던진 직후 사진 발견…"의거 현장 모습 유일 사진"
'구니노미야 상처' 기록도 최초 발견…"거사 성공으로 역사 새로 써야"
일제 충격 안긴 '타이중 의거' 현장의 조명하 의사 모습 찾아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육군 대장 척살에 나서 당시 일본에 큰 충격을 안긴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臺中) 의거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최초로 발견됐다.

또 당시 대만 현지 신문 기사를 통해 구니노미야가 조 의사의 의거로 부상했다는 내용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그간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수사·재판 기록을 주된 근거로 조 의사의 의거가 미수에 그쳤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구니노미야가 부상했다는 공식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를 '실패한 의거'에서 '성공한 의거'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인 김상호 대만 슈핑(修平)과기대 교수는 광복절을 앞둔 13일 연합뉴스에 최근 그가 발견한 당시 현장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1928년 6월 14일 발행된 일본어 신문인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 호외판 1면에 실린 이 사진은 그해 5월 14일 타이중 도심 도로에서 조 의사가 현지 경찰 등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체포되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둘러싸인 사람들에 사이로 조 의사의 오른쪽 얼굴 모습도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일제 충격 안긴 '타이중 의거' 현장의 조명하 의사 모습 찾아
대만 거주 한국인 학자로 지난 수년간 조 의사 관련 사료 발굴에 매진해온 김 교수는 "이 사진은 조 의사의 의거 현장 모습을 담은 유일한 사진"이라며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와 관련된 몇 안 되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해당 보도는 5월 14일 거사 이후 철저한 비밀 사안으로 한 달간 언론 보도 통제가 됐다가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며 "조 의사의 의거는 1920년대 일본 정부가 주장한 '본토 확대주의'의 허상을 보여준 것으로서 대만 총독부를 포함한 일본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조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독을 바른 단도를 들고 타이중시 도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지나던 구니노미야 대장을 급습했다.

일본 경찰과 검찰은 조 의사가 경호관에게 가로막히자 던진 단도가 구니노미야를 맞히지는 못했다고 발표했지만 구니노미야는 이듬해 1월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그간 역사학계에서는 조 의사의 단도가 구니노미야에게 닿지는 않았다는 당시 일제의 수사·재판 기록을 토대로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조 의사의 의거 후 구니노미야가 여러 차례 병원을 드나들었다가 복막염으로 사망한 기록을 근거로 일제가 당시 사건 파장을 축소·은폐하고자 조 의사의 의거를 실패로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 의사가 척살 시도를 대서특필한 1928년 6월 14일 일본어 대만일일신보 호외판 1면에 "(구니노미야) 전하께서 경상을 입으셨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새로 확인됐다.

일제 충격 안긴 '타이중 의거' 현장의 조명하 의사 모습 찾아
이보다 늦은 당일 오후 발행된 대만일일신보 중문판은 총독부의 공식 발표 내용을 인용해 구니노미야가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고 운전사만 등에 상처를 입었다고 내용이 갑자기 바뀌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일제는 구니노미야가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는데 그들이 실수로 부상 사실을 언급하고 이후 기사와 관련 기록에서 이 내용이 모두 사라졌다"며 "일제의 왜곡에 속아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가 실패로 기록된 것이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니노미야는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당시 일왕의 장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군부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실력자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으로 대만 총독이 경질될 정도로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가 일본에 준 충격은 컸다.

조 의사는 거사 직후 체포돼 그해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 사형장에서 스물셋의 나이로 순국했다.

일제의 식민 체제에 순응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조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서기직을 걷어차고 갓 태어난 아들과 부인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 건너가 타이중 의거에 나선 인물이다.

일제 충격 안긴 '타이중 의거' 현장의 조명하 의사 모습 찾아
독립운동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 의거에 나선 조 의사는 자신의 의거로 고국의 가족과 지인들이 고초를 겪을까 우려해 사진과 서한을 모두 불태우라고 요청하는 등 자신의 삶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런 탓에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 못지않게 조 의사의 의거가 당시 일제에 큰 충격을 줬음에도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잊힌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일제에 끼친 충격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일본 황족을 대상으로 한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더불어 '4대 의거'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조 의사의 장손 조경환씨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누구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거행한 의거였기에 더욱 숭고한 의미가 있는 거사임에도 중국 본토나 한국에서 일어난 의거가 아니었기에 후세의 기억에서 벗어나 있어 후손으로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계속)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