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중국 공산당 100년
1991년 공산권 맹주인 소련이 붕괴하자 서방 학자들은 그 다음이 중국 차례라고 예상했다.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와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경제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중국은 1978년 덩샤오핑 주도로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한 뒤 자본주의식 경제성장을 꾀하고 있었다. 서방의 이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중국은 이후 고도성장을 이뤘고, 미국과 함께 G2로 불릴 정도로 강대국이 됐다.

오늘은 중국공산당(中共) 창당 100년 기념일이다. 중국 곳곳에선 대대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다. 중공 창당일은 엄밀히 말하면 7월 1일이 아니라 7월 23일이다. 지하 정당으로 출발한 탓에 한동안 정확한 ‘생일’을 몰랐는데, 1938년 마오쩌둥이 한 강연에서 “올해 7월 1일은 중국공산당 건립 17주년 기념일”이라고 언급해 1일이 창당기념일이 됐다. 나중에 정확한 날짜가 밝혀졌지만 여전히 1일을 창당일로 챙긴다. 신격화된 마오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중공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72년간이나 최대 인구대국을 이끌어 왔다. 창당 때 고작 53명이던 당원은 9200만 명이 됐다. 중공이 이처럼 오래 권력을 유지하고, 번성한 비결은 뭘까.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냉혹함과 이념적 민첩성, 실질적인 중국인의 삶 개선을 꼽았다. 중공 지도부는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유혈진압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뒤 덩샤오핑은 인민을 굶주리게 한 마오의 노선을 버리고 ‘실용주의’를 택했다. 이후 빠른 경제성장과 함께 부패가 늘고, 사상적으로 느슨해지자 지금 시진핑 체제 들어 이념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 인권 등 국제사회 보편가치와는 반대로 갔다. 홍콩 민주화운동 탄압이 대표적이다.

중공이 100년이나 됐지만 계속 공부하고 변신한다는 점에서 ‘황혼의 위치’가 아니라 ‘여명의 위치’에 있다고 진단한 정치학자도 있다.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직이란 의미다. 100년을 맞은 중공은 대내적으론 중국몽(夢)으로 상징되는 애국주의를 앞세우고 있다. 대외적으론 국익을 앞세운 ‘전랑(늑대) 외교’를 펼친다. 중공의 꿈은 건국 100년이 되는 2049년 미국에 버금가는 ‘슈퍼파워’가 되는 것이다. 미국과의 지속적인 마찰이 불가피하다. 한국으로선 경제·외교·안보 면에서 더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박성완 논설위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