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500년 도읍의 유산…풍납·몽촌토성, 송파 고분군
[여기 어때] 2천년 고도 여행…한성백제를 찾아서
서울은 백제 500년, 조선 600년의 도읍지다.

수도 역사만 1천 년이 넘는다.

2천 년 고도다.

서울은 조선 건국 이래 계속된 600년 도읍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수도로서의 서울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길다.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백제는 서기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 493년 동안 한성,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삼았다.

백제가 서울에 도읍한 시기를 '한성백제' 시대라고 부른다.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된 뒤 백제는 웅진, 지금의 공주로 천도했다.

성왕은 538년 백제 부흥을 꿈꾸며 수도를 다시 사비, 현재의 부여로 옮겼다.

백제가 공주와 부여를 수도로 삼았던 '웅진 시대'와 '사비 시대'는 각각 64년, 123년이다.

백제는 한성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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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백제 영토는 북쪽으로 지금의 황해도, 남쪽으로 전라도와 제주도에 이르렀다.

백제왕 31명 중 21명이 한성 시대에 즉위했다.

그런데도 백제 수도로 대부분 공주, 부여를 떠올릴 뿐 서울이 백제의 500년 도읍지였다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백제가 존속했던 678년 중 73%에 해당하는 493년 동안 한성이 수도였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무령왕릉, 백마강, 낙화암 등 백제의 주요 유적과 유물이 주로 공주와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은 백제의 수도로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만 이렇다 할 유물이나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성 백제의 실체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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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80년대와 1990년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본격적으로 발굴됐다.

몽촌토성은 86서울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열기 위해 올림픽공원을 조성하던 중, 풍납토성은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유물과 유구가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한성 백제의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두 성은 백제의 왕성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 됐다.

◇ 백제의 터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한성백제 시대의 핵심 유적인 풍납토성은 크기와 축조 기술이 주목거리다.

국내에서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체 둘레 3.5㎞ 중 2.2㎞가 남아있다.

성벽 너비 43m, 높이 11m 이상이며, 성안 면적은 87만8천㎡다.

풍납토성은 판축법, 즉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 쌓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흙성은 석성보다 튼튼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 않다.

균일하게 채 친 고운 진흙을 단단하게 다져, 폭이 넓은 사다리꼴 벽을 쌓으면 석성보다 더 견고하다.

풍납토성이 2천 년 가까이 세월을 이기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중국 고대 토성 건설에 사용됐던 판축법을 백제는 '백제화'한 뒤 일본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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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은 백제의 첫 왕성으로, 한성으로 불린다.

한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이루어졌는데 풍납토성이 북성, 몽촌토성이 남성이다.

풍납은 왕의 평시 거주성이었으며, 몽촌은 방어적 성격이 강하고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은 공중에서 보면 배 모양이다.

맑은 날 인근 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한강 변에 정박한 옛 나무배처럼 보인다.

'풍납토성' 호는 푸른 한강 물을 휘젓고 곧 바다를 향해 항해를 떠날 것 같은 모습이다.

백제는 중국, 일본은 물론 멀리 인도와 교류하며 항해술을 발달시켰던 글로벌 국가였다.

배 형상의 풍납토성은 '글로벌 백제'를 상징하는 듯하다.

풍납토성 성벽 안쪽에는 현재 아파트 등 주택이 들어서 있다.

풍납토성은 강남 아파트 개발 붐에 휩쓸려 자칫 사라지거나 훼손될 뻔했던 위기를 넘기고, 2000년 국가 차원의 보존정책이 수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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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 연구소 주도의 발굴 조사로 취락, 제사 건물지인 경당, 우물, 궁궐 창고 등으로 판단되는 유구가 확인됐다.

풍납토성 주변에는 경당역사공원, 백제우물, 풍납근린공원 등 역사를 음미하며 휴식할 수 있는 쉼터와 볼거리들이 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공원과 토성 근처에는 화사한 봄볕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거나 운동을 하는 주민이 많았다.

복잡한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풍납토성을 끼고 걷는 길인 '한성 백제 왕도길'이 3개 코스, 9㎞로 조성돼 있다.

풍납토성은 빽빽한 아파트 숲 가운데 넓은 들처럼 펼쳐져 있다.

풍납토성을 낀 백제 왕도길을 김경숙 송파구 문화관광해설사는 시민에게 위안을 주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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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700m 떨어진 곳에 몽촌토성이 있다.

몽촌토성은 한강 변까지 뻗어내린 남한산(480m) 끝자락에 해발 45m 내외의 자연 구릉을 이용해 쌓은 토성이다.

흙으로 만들었지만, 산자락에 만들어져 산성이라고도 한다.

전체 둘레 2.2㎞이고, 형태는 남북 730m, 동서 570m의 마름모꼴이다.

동쪽에 작은 외성이 있고, 성 외곽에는 자연 하천을 이용해 만든 해자가 있다.

성안에 있던 곰말(꿈말) 마을은 몽촌토성 이름의 유래다.

몽촌토성 발굴 조사로 성 안팎에서 주거지, 움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고 수천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세월이 흐르면 토성은 비바람이 불고 사람들이 밟아 위쪽 흙이 소실된다.

반면 바닥에는 흙이 쌓여 성벽의 높이가 낮은 것처럼 보인다.

몽촌토성도 마찬가지다.

언뜻 성벽이 별로 높지 않아 고대에 방어시설로서 기능했을까 싶다.

주변 고층 아파트와 빌딩에 파묻힌 몽촌토성은 더 그렇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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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해설사는 우리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갖도록 재촉했다.

높은 구조물이라고는 없었던 고대에 몽촌토성은 멀리 북한산, 아차산, 남한산, 이성산, 검단산 등 사방을 훤히 관찰할 수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표고 35∼45m인 성벽의 네 귀퉁이에 있는 토단에 올라서면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성내동 일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몽촌토성은 1980년대 발굴 이후 약 30년만인 2013년에 발굴작업이 재개돼 진행 중이다.

그 결과 이전 조사에서 찾지 못했거나 잘못 파악했던 부분이 수정되고 있다.

일례로 경계 표시 및 방어 구조물인 목책의 흔적으로 보였던 성벽 기둥 자리는 영정주를 세웠던 흔적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영정주는 성벽을 쌓기 위해 세운 나무 기둥을 말한다.

탐방객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서북쪽 성벽의 목책은 이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이었던 대형 포장도로 흔적도 발견됐다.

몽촌토성을 포함해 올림픽공원은 송파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시민 휴식 공간이 됐다.

공원 안에는 몽촌역사관, 한성백제박물관, 서울역사편찬원, 몽촌해자, 백제집자리전시관 등 백제 관련 유적이나 문화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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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안식처, 거대한 고분 지구
송파구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에는 수백 기의 고분이 있었다.

1917년 작성된 고분 분포도에 따르면 당시 고분은 293기에 달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분은 20기 정도다.

불과 100년 사이에 90%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약 90기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된 석촌동 고분군에는 현재 적석총 5기, 토광묘 2기, 봉토분 1기가 남아 있다.

이 중 제3호분은 고구려 장군총을 떠올리는 거대한 기단식 적석총이다.

동서 방향 길이가 50.8m, 남북 방향 길이가 48.8m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계단식 돌무덤이다.

계단은 3단 이상이고, 높이는 최소 4.5m인데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다.

삼국시대 왕릉과 비교할 때 이 정도 큰 무덤의 주인은 왕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 백제 시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는 근초고왕(?∼375)의 능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2015년 1호분과 2호분 사이에서 17기에 달하는 연접 돌무지무덤이 발견돼 현재 발굴 작업 중이다.

발굴이 끝나면 석촌동 고분군 내 무덤의 수는 훨씬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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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방이동 일대에는 30여 기의 고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1호부터 10호까지 8개만 남아 있다.

당초 보존 대상이었던 4·5호분은 도시개발 와중에 사라졌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인 고구려나 신라 고분과 달리 백제 고분은 도굴이 쉬워 무덤 속에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

관련 기록이 별로 없는 백제사를 연구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다.

무덤 주인을 특정하기 어렵지만, 무덤의 크기, 왕성인 풍납·몽촌 토성에서 가까운 점, 출토된 유물의 높은 수준 등으로 볼 때 이 고분군의 주인은 왕이나 왕족, 귀족일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고분군은 풍납·몽촌 토성과 함께 '한성 백제'의 핵심 유적이다.

백제 고분군들은 옛날에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고분 지대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은 석촌, 방이, 가락동 등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별개의 고분군으로 인식된다.

백제 왕실 묘역의 위상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하다.

백제 고분군들을 하나의 유적으로 보아 한성 백제의 왕릉 지구로 설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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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정도 2천 년의 고도
서울시는 1994년 정도 60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종로구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는 조선과 근현대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민의 뇌리엔 서울의 연원이 600여 년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서울의 역사적 지평은 넓고 도시 정체성은 풍부하다.

서울은 백제 시대를 포함하면 정도 역사가 2천 년에 이르는 고도다.

서울과 경쟁하는 싱가포르나 홍콩과는 비교되지 않게 전통과 문화가 풍성하다.

풍납토성을 '한국의 폼페이'라고 한다.

풍납토성 아래 땅속에 묻힌 유물이 한반도 고대사를 새로 쓰게 할 만큼 위력적인 데서 나온 말이다.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돼 있다.

서울의 백제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포함시키는 백제역사유적지구 확장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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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몽촌 토성, 백제 고분군은 규모, 역사적 진실성 등을 볼 때 머지않아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서울은 수도권을 합한 지역내총생산(GRDP)이 세계 4위에 이른다.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국제도시다.

역사, 자연, 문화는 경제력만큼이나 소중한 서울의 정체성이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 오늘을 살고 미래를 엮어가는 우리의 삶은 더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거센 바람에 뿌리 없는 것들이 쓰러질 때도, 스스로 역사를 의식하는 사회는 굳건히 버티게 마련이다.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고히 할 때 서울은 세계인의 수도가 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