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만난 AI 로봇, 희망에 눈뜨다
인공지능(AI)과 유전공학이 발달한 머지않은 미래의 미국. 유전적으로 향상된 아이들은 집에서 원격교육을 받는다. 학교에서 친구를 만날 기회가 사라지면서 AF(Artificial Friend)라는 돌보미 로봇이 집에서 아이들의 친구 노릇을 해준다. AF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데다 인공지능을 장착해 똑똑하기까지 하다. 소녀형 AF 클라라는 매장 쇼윈도에서 자신을 데려갈 아이와의 운명적 만남을 기다린다. 다양한 능력을 지닌 최신형 ‘B3’ 모델보다 구형이지만 클라라는 다른 로봇들과 달리 인간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감정과 소통방식을 익히는 데 유독 특화돼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로봇과 친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인간.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7)의 신작 장편소설 《클라라와 태양》(민음사·사진)은 이 두 연약한 존재가 우연히 만나는 순간부터 담담하게 헤어지기까지를 담아냈다. 작가가 노벨상 수상 이후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영미판은 지난 3일 영국 미국 캐나다에서 먼저 나왔고 이후 30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소설은 1인칭 화자인 클라라의 불완전한 인식 구조와 감정 상태가 점차 묘하게 변화,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데려갈 아이를 기다리는 설렘에서 시작된 클라라의 감정은 소녀 조시와 만나며 기쁨으로 바뀐다. 조시는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건강에 이상이 있는 아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한 조시의 굳은 약속을 믿고 다른 아이의 선택을 거부한다. 며칠째 조시가 오지 않자 클라라는 이내 실망과 불안함을 느낀다.

불안한 클라라에게 다시 ‘희망’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것은 ‘태양’이다. 길바닥에서 꼼짝 않고 있어 죽은 줄 알았던 부랑인과 개가 태양의 따스함에 눈을 뜨고 일어나자 클라라는 태양에 특별한 자양분이 있다고 믿는다. 클라라는 말한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른들이 생각해 보지 않은 곳에서 도움이 올 수 있다고 믿어요.” 소설 말미, 위기의 순간에 클라라는 태양을 통해 얻은, 이 믿음 어린 희망을 바탕으로 기적 같은 반전을 이뤄낸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을 추구하는 클라라는 자신을 선택한 조시에게 한결같이 헌신하며 믿음을 실현해간다. 이 과정을 통해 “과연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다를까”라고 작가는 묻는다. 대상이 무엇이든 어떤 존재가 보여주는 지극함이 사랑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사랑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그만의 화법이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