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마약 적발량 중 사상 최대로 꼽혔던 '벌크선 코카인 밀수 사건' 필리핀 선원이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공소사실이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인데, 해경과 검찰에서 주범으로 지목했던 피고인이 혐의를 벗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돼 수백억대 마약을 누가 숨겼는 지 등 정확한 사건 경위가 미궁에 빠질 수도 있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13일 대전고법 형사1부(이준명 부장판사)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마약) 혐의로 기소됐다가 1심에서 무죄를 받은 필리핀 국적 A(63)씨 항소심 사건에서 검사 항소를 기각했다.
일등 항해사인 A씨는 지난해 7월 7일 콜롬비아에서 출발해 한 달여 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태안항에 입항할 예정이던 9만4천528t급 석탄 운반용 벌크선(홍콩 선적) 체인로커(앵커체인 보관 시설) 안에 코카인 약 101㎏(400억원 상당)을 숨겨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첩보를 입수한 중부지방해양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태안항 인근까지 접근한 선박을 관세청 관계자 등과 함께 뒤져 군용가방 4개에 들어 있던 마약을 발견했다.
수사기관에서 압수한 코카인 양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해경은 설명했다.
1심을 맡은 대전지법 서산지원 형사1부(이동욱 부장판사)는 그러나 A씨에게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에서 제시한 '선박항해기록장치'(Voyage Data Recorder·VDR) 녹음 대화상 A씨가 코카인을 운반하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VDR 녹음파일의 존재만으로는 피고인이 다른 선원에게 코카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대화 사이에 기계음 등 잡음 때문에 여러 통역인(5명) 누구도 피고인 말을 정확하게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음질 개선이나 검찰 성문(음성을 줄무늬 모양으로 나타낸 것) 분석 감정 등으로도 A씨가 코카인이라는 단어를 말했는지 확실하게 판명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체인로커가 있는 갑판창고에 자유롭게 출입할 권한이 피고인에게 있었다'는 사정도 유죄 증거로 쓸 만한 증명력이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을 비롯한 선원들 물품에서 이 사건 마약과 관련한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며 "피고인이 이 사건 마약을 운반하는 대가로 재산상 이득을 취했다는 정황도 보이지 않는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덧붙였다.
검사의 심리미진과 사실오인 주장에 따라 항소심을 맡은 대전고법 재판부 역시 원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통역인이 (녹음 대화 중) 오케이(okay)인지 코케인(cocaine)인지 헷갈릴 만큼 내용 파악이 쉽지 않다"며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주범 격으로 여겨져 구속 기소됐던 A씨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 받으면서, 이 사건 경위는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사건 당시 해경은 갑판장 B씨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는데, B씨의 경우도 비슷한 사정으로 처벌은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