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칼럼] 물거품 된 '노무현의 금융허브 꿈'
‘동북아 금융허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밑그림을 그린 물류 주축의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 구상을 금융 허브로 진화시킨 게 노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 김기환 골드만삭스 고문과 윤병철 우리금융지주 회장 등이 “금융 경쟁력 없이는 비즈니스 중심국이 될 수 없다”고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고급 일자리를 창출하는 금융산업이야말로 당시에도 심각했던 청년실업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노 전 대통령은 금융 중에서도 주식 채권 등에 돈을 굴리는 자산운용업에 주목했다. 아시아지역이 잠재력에 비해 자산운용업 수준이 낮은 데다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풍부하고, 수백조원의 국민연금 운용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 비교우위가 있다고 봤다. 노무현 정부가 2004년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을 개정해 토종사모펀드를 허용하고 싱가포르투자청(GIC)을 본뜬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한 배경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를 통해 2020년까지 한국을 홍콩 싱가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3대 금융허브로 키운다는 로드맵을 수립했다.

이 로드맵대로라면 아시아 금융허브가 돼 있어야 할 지금 한국은 어떤가. 마침 홍콩을 대체할 아시아 금융허브를 노린 각국의 쟁탈전이 치열하다. 지난 7월 홍콩보안법 시행으로 홍콩을 떠나려는 글로벌 금융사의 아시아본부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본과 대만 정부는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일본은 국제금융도시 구상을 발표하고 세금 인하, 외국인 체류 자격 완화, 외국인 교육환경 정비 등에 나섰다. 대만도 홍콩을 이탈하는 거주민과 기업의 이주를 지원하는 사무소를 개설하고 소득세도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한국은 금융허브가 되겠다는 의지조차 내비치지 않고 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한 회의에서 “우리는 홍콩과 싱가포르에 비해 법인세 소득세가 높고 노동시장도 경직돼 있다”면서도 “금융허브만을 위한 세제와 고용제도 개편엔 한계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아시아 금융허브를 위한 환경 개선은 애당초 가능성이 없으니 포기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한국의 국제금융 경쟁력도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2015년 세계 6위였던 서울의 국제금융센터지수(GFCI)는 올해 33위로 떨어졌다. 국내 진출한 외국계 금융사 숫자도 같은 기간 166개에서 162개로 줄었다.

이런 데는 문재인 정부의 금융에 대한 편견 탓이 크다. 노무현 정부와 뿌리는 같지만 금융을 보는 시각은 딴판이다. 문재인 정부는 금융을 고급 일자리와 고부가가치를 낳는 산업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실물경제를 상대로 ‘돈놀이’를 하며 중소기업과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고리대금업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경제성장 전략도 재정에 의존하다보니 금융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금융산업에 대한 언급이 한 줄도 없고, 임기 초부터 키코 사태 재조사 등 적폐 청산과 카드 수수료 인하, 은행 가산금리 억제와 같은 규제에만 열중한 것도 이런 이유다.

금융을 소 닭 보듯 해 임기 초부터 ‘금융 홀대론’이 나왔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며 “은행 대출을 늘려라, 줄여라” 식의 참견으로 금융자율화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 관치(官治)를 넘어 ‘정치(政治) 금융’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법무부 장관은 금융의 부동산 지배를 막아야 한다며 ‘금부(金不) 분리’라는 기상천외한 주장까지 한다. 글로벌 금융사 유치엔 ‘쥐약’인 법인세와 소득세를 올리고 국책은행의 지방 이전을 추진해 금융허브 전략엔 완전히 역주행하고 있다.

이 와중에 터진 라임·옵티머스 펀드 스캔들을 보면 허탈하기 짝이 없다. 자산운용의 실력을 키워 금융허브의 밑거름이 되라고 허용한 이들 사모펀드(헤지펀드)가 감독당국의 방치 속에 금융사기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서다. 여기에 정·관계 인사들이 두루 연루됐다는 로비 의혹은 한국 금융시스템이 아직도 얼마나 후진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동북아 금융허브를 꿈꿨던 노 전 대통령이 지하에서 땅을 칠 일이다.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