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광복 75주년 특집 다큐 15일 방송
약점 극복하고 승리한 독립군…왜 봉오동과 청산리였나
EBS 1TV는 광복절인 오는 15일 오후 5시부터 광복 75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승리의 기억, 봉오동 전투'와 '독립군의 위대한 유산, 청산리 전투'를 연이어 방송한다고 11일 예고했다.

1부는 최강의 일본 정예부대에 맞선 우리 독립군의 첫 승리, 봉오동 전투에 대해 살펴본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들이 스스로 '독립전쟁 제1회전'이라 칭하며, 독립군의 계획과 작전에 의해 승리한 싸움이다.

임시정부의 필요성에 따라 의병 출신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홍범도 부대, 자금과 무기를 갖추고 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동포사회의 기반이 단단한 안무의 국민회로 대한북로독군부가 구성됐고, 독립군 삼단연합이 됐다.

1920년 6월,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으로 집결한다.

당시 봉오동은 이미 조선인들이 마을을 이뤄 사는 곳이었으며, 경작할 땅이 많아 자금도 넉넉했고,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세계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던 일본군이었지만 봉오동의 지형지물은 독립군의 편이었다.

유인작전으로 적을 가두고, 허를 찌르는 매복과 기습 공격으로 적을 궤멸시킨 것이다.

사상자 120여 명을 내고 우리 독립군의 강인한 전투력에 매우 놀란 일본군은 비밀문서에 '북간도 지역이 이제 곧 독립이 될 것 같다'라고 적었다.

2부에서는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독립군이 다양한 방법으로 무기를 산 과정을 살펴본다.

1912년 우당 이회영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부터 1920년 북간도의 사관연성소까지,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은 체계적인 군사 훈련으로 결집했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은 '사관연성소'를 설립해 독립군 정예장교를 양성해 냈고, 여러 통로를 통해 다양한 근대식 무기까지 사들였다.

당시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북로군정서 병사는 소총 1정에 총탄 500발, 수류탄 1개를 소지해 언제든 실전투입이 가능할 정도의 무장상태라고 판단했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의 대규모 토벌 작전에 맞선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로 속속히 모여든다.

그리고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 전투의 막이 올랐다.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매복 작전과 영리한 유인 작전. 독립군 부대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군을 격파해나간다.

프로그램에서는 여러 전문가의 분석은 물론, 다양한 당시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한 재연을 통해 6일간의 치열했던 전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두 다큐멘터리는 국방TV에서 제작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