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키워드는 ‘진정성’이었다. 문 대통령은 집권 직후부터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진정성 있는 접근”을 강조했다. 그 덕분인지 몇 번의 정상회담도 열렸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북한은 문 대통령을 겨냥해 ‘철면피’ 등 막말을 쏟아냈다. 북을 달래려고 통일부 장관을 교체하는 ‘특급 성의’까지 보였지만 ‘오지랖 넓은 사람’이란 비아냥이 돌아왔다. 진정성의 약발이 다했다고 느껴서일까, 정부는 ‘상상력’이라는 새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는 지명 직후 “상상력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뚫겠다”는 일성을 내놨다. 때맞춰 여권의 메시지도 상상력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대통령 대북정책자문역인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삐라 살포로 망가진 관계를 복원시킬 방법으로 진정성을 강조하다 그제부터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설파하고 다닌다.

다소 갑작스런 상상력의 부상은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프랑스 68혁명의 기억을 소환한다. 뚜렷한 혁명의 계기도, 지도부도 없었던 이 수상한 혁명은 대학생들이 이끌었다. 역사상 최초의 비(非)프롤레타리아 주도 혁명이었다. ‘금지를 금지하라’ ‘혁명을 생각하면 섹스가 떠오른다’ 같은 상상 밖의 구호를 내걸고 기존 정치체제와 윤리에 대한 전면적 반란을 꾀했다.

목표조차 희미해 파괴와 혼란으로 치달았던 68혁명의 전개는 현 정부 대북정책의 모호함과 오버랩된다. ‘대북 상상력’은 사실 문 대통령이 수차례 해온 말이다. 1년 전 트럼프·김정은 판문점 회동 이후 열린 국무회의에서 ‘상상력’이란 단어를 8번이나 언급하며 감격해했다. 그런데 ‘상상력’ 발언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 돌아가는 분위기가 수상하다. 정세현 부의장은 라디오에 출연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든 건 미국”이라는 엉뚱한 진단을 내놨다. 2001년 평양을 다녀온 김대중 대통령이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개발할 능력도 없다”고 한 것과 비슷한 빗나간 상상력이다.

북핵이 안 풀리는 이유는 ‘상상력 빈곤’이 아니라 ‘상상력 과잉’ 탓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교훈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상상은 ‘망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고 보니 여성비하 구설에 오른 탁현민 청와대 비서관이 쓴 책 제목이 《상상력에 권력을》이었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