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방어 절체절명 순간, 부산 14개교 학생들 전장으로 달려가
40일 훈련 후 배치, 혁혁한 전공…전사 등 400명 이상 희생
현재 200명 남짓 생존, 동지회 "존재와 활약 영원히 기억됐으면"
[6.25전쟁 70년] "펜 대신 총, 1천661명의 헌7학병을 아시나요"
"전투 경험은 모자랐어도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결의는 누구보다 강했다고 자부합니다.

"
부산 헌7학병(憲7學兵) 동지회 문백(89) 고문은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절도 있는 거수경례로 인사를 받았다.

문 고문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8월 부산 동래중학교 6학년 때 소집영장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영남지역 일부만 남긴 채 대구를 기점으로 하는 낙동강 최후 방어 전선이 구축된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당시 부산에서 그를 비롯한 지역 14개 학교 재학생 1천661명이 육군 헌병학교 7기생(헌7학병)으로 입대했다.

엘리트로 꼽히던 그들은 펜과 책을 놓고 너나 할 것 없이 총을 들었다.

공병학 동지회 사무총장은 "단일 기수 입대 인원 1천661명은 엄청난 규모"라고 말했다.

문 고문은 "한 달 넘게 무지막지한 훈련이 이어졌다"며 "훈련 기간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낙오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6.25전쟁 70년] "펜 대신 총, 1천661명의 헌7학병을 아시나요"
헌7학병은 40일 넘게 군사훈련을 받고 각 사단과 포로수용소 등에 배치됐다.

이들은 전투 현장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주요 길목을 안내하는 등 필수 임무를 맡았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부리는 흥남철수작전, 한국은행 금괴 이송, 전쟁포로 수용과 반공포로 석방 등에 투입되기도 했다.

때로는 지휘관 명령을 받아 목숨을 걸고 전장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헌7학병 동지회 김지환(91) 총무는 "전장에서 총소리를 처음 들으면서 논두렁을 달리다가 깜짝 놀라서 여러 번 넘어지기도 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헌7학병들은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해 국군이 압록강과 혜산진 등까지 진격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런 성과 뒤에는 큰 대가도 치러야 했다.

김화지구 전투에서 70명 이상이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6.25전쟁 70년] "펜 대신 총, 1천661명의 헌7학병을 아시나요"
이후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각 전선에서 전사, 전상, 실종, 포로 등 헌7학병 동기 400명 이상이 희생됐다.

휴전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헌7학병들은 동지회를 꾸려 먼저 간 동기들의 넋을 기리면서 학업을 계속하거나 각계각층으로 흩어져 우리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남은 청춘을 바쳤다.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 동지회 회원은 200명 조금 안 되는 인원이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시와 동지회는 2001년 헌7학병의 애국 희생정신을 영구히 기념하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성지곡 수원지 주변에 '헌7학병 6·25참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참전기념비는 2003년 5월 30일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6.25전쟁 70년] "펜 대신 총, 1천661명의 헌7학병을 아시나요"
매년 6월 27일이 되면 참전기념비 앞에서는 헌7학병 동지회 주관으로 성대한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문 고문은 "당시 우리는 천진난만한 학생이었지만, 졸지에 국란 최일선에 섰다"며 "오직 '이겨야 한다', '죽으면 안 된다',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세월이 더 흐르면 우리가 모두 떠나고 없겠지만, 우리 헌7학병의 존재와 활약이 영원히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