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코로나19'와 싸우는 박에스더 후예들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의 요청에 따라 1885년 4월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이 서울 재동에서 문을 연 데 이어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그해 9월 서울 정동에서 진료를 시작했지만 조선의 여성들은 근대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당시 풍습과 사회 분위기로는 여성 환자가 서양 남자에게 몸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크랜턴 모자는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여의사 파견을 청원했고, 1886년 10월 메타 하워드가 입국해 윌리엄과 함께 환자를 돌봤다.

그러나 여의사가 왔어도 여성 환자는 좀처럼 찾지 않았다.

남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옷을 걷어 환부를 보여주기를 꺼린 탓이다.

미국 감리교 지원으로 1887년 10월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이 세워진 뒤에야 마음 놓고 병원을 드나들었다.

하워드가 과로로 건강이 나빠져 귀국하자 1890년 캐나다 출신 로제타 홀이 2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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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로제타의 통역을 맡은 소녀가 김점동이었다.

그는 아버지 김홍택이 감리교 선교사 거하드 아펜젤러가 세운 벧엘예배당(정동제일교회 전신)에서 일하고 있던 인연으로 10살 때인 1887년 이화학당에 4번째로 입학해 신학문과 영어를 배웠다.

점동은 로제타를 스승이자 언니처럼 따랐고, 로제타도 영특하고 성실한 점동을 무척 아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한 모녀가 찾아왔다.

점동이 "아직 병원 문을 열기 전이니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하자 어머니는 "딸이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하니 제발 지금 원장님을 뵙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딸은 흔히 언청이라고 놀림당하는 구순구개열 환자였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모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점동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의사가 몸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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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는 점동을 포함한 이화학당 학생 4명과 일본인 여성 1명으로 의료보조훈련반(Medical Training Class)을 꾸려 국내 최초로 여성에게 근대의학을 가르쳤다.

1892년 의료선교사 윌리엄 홀과 올린 서양식 결혼식도 국내에선 처음이었다.

점동은 1891년 세례명을 따 에스더로 개명한 데 이어 1893년 윌리엄 홀의 소개로 마부 출신의 개신교 신도 박여선과 교회에서 화촉을 밝혔다.

남편 성을 따르는 서양식 풍습대로 김에스더에서 박에스더가 됐다.

기쁨도 잠시, 둘에게 불행이 닥쳤다.

1894년 8월 박에스더는 갓 낳은 아들을 잃었다.

11월 로제타는 발진티푸스에 걸린 남편을 떠나보냈다.

그때 로제타는 두 살배기 아들 셔우드와 뱃속에 7개월 된 딸 에디스를 품고 있었다.

남편을 잃은 상처를 달래고 둘째를 출산하러 미국으로 돌아간 뒤 박에스더 내외를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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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박에스더는 뉴욕 리버티공립학교를 거쳐 존스홉킨스대 전신인 볼티모어여자의과대에 입학했다.

남편은 농장과 식당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아내의 학비를 보태다가 1900년 아내의 졸업시험 3주 전 폐결핵으로 숨졌다.

그에 앞서 1896년 2월 딸 박로제타를 낳았다가 또 4개월 만에 여의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박에스더는 마침내 의사가 됐다.

한국인이 미국 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은 1893년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이자 우리나라 여성 의사 1호였다.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음에도 고통받는 모국의 여성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마음에 곧바로 귀국해 5대 보구녀관 원장이 됐다.

자녀와 함께 먼저 한국에 돌아와 있던 로제타는 평양에 광혜녀원(廣惠女院)을 설립하는 한편 국내 최초로 맹학교를 세우고 점자를 보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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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는 귀국하자마자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헌신적으로 일했다.

매년 3천 건 넘게 진료했고 1904년에는 진료건수가 8천여 건에 이르렀다.

1년 평균 왕진 건수도 100여 회를 헤아렸다.

눈이 오면 당나귀에 썰매를 매달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 집을 찾았다.

주술이나 부적 등에 의존하던 여성들을 상대로 보건위생 교육과 복음 전파에도 힘썼다.

고종 황제는 1909년 4월 초대 여자 외국유학생 환영회를 열고 박에스더와 함께 아메리칸대에서 영문학사 학위를 받고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일하던 김란사, 일본 도쿄(東京)여자음악원을 졸업하고 한성고등여학교(경기여고 전신)에 부임한 윤정원 등 여성 선각자들에게 표창과 메달을 수여했다.

황성신문 4월 28일 자는 이 소식을 "우리나라 오백여 년 부인계에서 외국에 유학하여 문명한 지식으로 여자를 교육함은 처음 있는 아름다운 일이라. 여자 학업이 점차 발달됨은 가히 축하하겠도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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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모국에서 배운 인술을 펼친 기간은 딱 10년이었다.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폐결핵이 발병한 데다 과로가 겹쳐 1910년 4월 13일 쓸쓸히 눈을 감았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에스더는 유대인 동포들을 살린 페르시아 왕비의 이름으로 별이란 뜻의 히브리어다.

박에스더 역시 살아서는 많은 조선 여성의 목숨을 구하고 죽어서는 별이 됐다.

로제타는 물론이거니와 박에스더를 이모나 누나처럼 따르던 셔우드의 충격은 컸다.

사업가를 꿈꾸던 그는 "나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에스더와 수많은 조선인을 데려간 결핵을 퇴치하는 전문의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

1928년 결핵 전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운 데 이어 결핵 퇴치기금 마련을 위해 1932년 12월 3일 크리스마스실을 처음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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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는 2006년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에 여성 최초로 헌정됐다.

보구녀관은 지금의 이화여대의료원으로 발전했다.

박에스더 뒤를 이어 의사로 활약하는 한국인 여성은 2019년 기준으로 전체 의사의 4분의 1가량인 약 3만2천300명에 이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책임진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도 이 가운데 한 명이다.

여의사들은 모두 박에스더와 스크랜턴·홀 모자에게 빚지고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여성 의료인의 역사는 훨씬 늦게 시작됐을 것이다.

13일은 박에스더 서거 110주기 기념일이다.

박에스더의 선구자적 발자취에 고개 숙이고 홀 모자의 희생과 헌신에 옷깃을 여민다.

세계 곳곳에서 코로나19로부터 환자를 구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박에스더와 홀 모자의 후예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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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