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자리 연연 않겠다"…'해임 압박' 이해찬과 충돌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사진)이 12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거취 압박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강력한 유감을 나타냈다. 전날 이 대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추가경정예산 증액에 소극적인 기재부를 질타하면서 “(홍 부총리를) 물러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데 대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홍 부총리는 이날 밤 10시 SNS에 올린 글에서 “위기를 버티고 이겨내 다시 일어서게 하려고 사투 중인데 갑자기 거취 논란이 일었다”며 “혹여나 자리에 연연해하는 사람으로 비쳐질까 걱정”이라고 썼다. 발단은 전날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이 대표의 발언이었다. 이 대표는 정부의 추경안에 대해 보고를 받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이렇게 한가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며 “홍 부총리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면 당이 나서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관계자는 “이 대표가 격노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민주당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11조7000억원 규모의 추경안을 18조원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이에 대해 “지금은 우리 모두가 뜨거운 가슴뿐만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필요한 때”라고 밝혀 재정 건전성을 감안해 증액은 어렵다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홍 부총리는 “기재부는 어려운 계층 지원도, 경제 살리기도, 재정 건전성과 여력도 모두 다 치밀하게 들여다보고 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 부총리는 원격진료 도입에 관한 소신도 밝혔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정부와 의료계도 원격진료 허용·금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전향적인 논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홍남기 "위기와 사투 중인데" 거취 논란에 불쾌감…"원격진료 전향적 논의할 때" 소신
"혹여 자리 연연 비쳐질까봐 걱정…추경은 재정 여력 등 고려해 결정"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해임을 거론하고, 홍 부총리는 이 대표를 향해 “차가운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맞받으며 문재인 정부 후반기에 당정 관계가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민주당이 내세운 해임 이유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이 시국에 홍 부총리가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기재부를 비롯한 경제부처 사이에서는 “재정 건전성을 지키는 것은 경제부총리의 의무인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응이 나온다.

○당정 갈등 본격화하나

이 대표는 지난 11일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으로부터 추경안을 대규모로 증액하는 것은 어렵다는 홍 부총리의 입장을 전달받았다. 이 대표는 “코로나19로 국가가 위기 상황인데 공무원들이 국가 채무비율 등을 이유로 반대하면 안 된다”며 “(조 의장이) 강력하게 증액을 건의하라”고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홍 부총리를) 물러나라고 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날인 12일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홍 부총리는 오후 10시께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홍 부총리는 “정부의 추경안은 전년 대비 9.1% 늘어난 올해 예산, 2조원의 목적예비비(일반예비비까지 3조4000억원), 정부 및 공공·금융기관이 내놓은 20조원 규모의 코로나19 대책, 추경 대상 사업을 검토한 뒤 재정 뒷받침 여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 후 국회에 제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 부총리는 “지금은 우리 모두가 뜨거운 가슴뿐만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필요한 때”라며 “‘눈 덮인 들판을 지나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뒤따라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시구를 떠올려 본다”고 썼다. 관가에서는 ‘차가운 머리’ ‘함부로 걷지 마라’ 등의 표현이 이 대표를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기재부 “당 대표의 월권” 반발

이 대표가 “홍 부총리에 대한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고 한 발언이 알려지자 이날 기재부 내에서는 격앙된 반응이 흘러나왔다. 기재부 관계자는 “부총리가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의무”라며 “이를 빌미로 해임을 건의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재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재부 관계자는 “현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국가채무는 660조원이었지만 올해는 800조원을 넘을 것이 확실시된다”며 “그럼에도 빚을 왜 더 늘리지 않느냐고 압박하는 게 이치에 맞느냐”고 했다.

이 대표와 홍 부총리의 갈등을 계기로 당청에 대한 정부 부처들의 불만이 표면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홍 부총리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원격진료는 환자 격리, 의료진 감염 보호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원격의료 도입 필요성도 주장했다. 그는 “의료진이 대구·경북 등에 투입됐을 때 원격진료가 일반진료를 위한 좋은 보완재가 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또 “개인 의료 데이터 수집·분석·활용과 원격진료 등 디지털 헬스케어는 궁극적으로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관리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의료계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향적 논의를 시작하길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이태훈/김우섭/김소현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