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청년 일자리 정책은 계획에 없구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서 “고용 연장에 대해서도 이제 본격적으로 검토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청와대는 “2020년 경제정책방향 발표의 연장선에 있는 내용”이라며 주워담았지만 파장은 컸다. 청와대 게시판 등에서 젊은이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청년 취업난이 심각하다. 많은 젊은이가 구직 활동을 아예 포기할 정도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노동자들의 퇴직 연령을 늦추는 것은 정책균형 상실이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이미 고령층 위주로 짜여 있다. 노인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49만6000개에서 2019년 68만4000개로 늘었다. 쓰레기 줍기나 교통 안내 등 공익형 노인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공산품 제조, 카페 운영, 택배 등 민간형 노인 일자리도 10만 개가 넘는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고령층 위주로 된 까닭은 무엇일까. 청년층 일자리와 고령층 일자리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정부가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그 차이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청년에게 일자리는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 공간이다. 사회인으로서 자립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도 키우고, 자신의 존재감도 키워가는 원천이다. 소득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은 일할 능력뿐만 아니라 사회성도 잃어간다. 밖에 나가는 것도 기피하게 된다. 결국 자유를 잃는다. 그래서 청년 실업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령층은 다르다. 이미 사회를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이다. 자녀도 다 키웠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봉사활동, 문화생활을 즐기더라도 거리낄 게 없다. 직장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젊은이들처럼 절실하지는 않다. 삶의 품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돈이다. 주요 선진국이 청년층에 일자리를, 고령층에는 연금 등 현금성 복지를 제공하는 이유다.

우리는 거꾸로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가 아니라 돈을 뿌리고 있다. 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들이 학자금과 구직활동 지원금뿐만 아니라 청년수당 등 현금성 지출을 늘리고 있다. 돈이 없는 젊은이의 생활고를 덜어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정부에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은 나쁜 일이다. 일을 안 준다는 점에서 악덕 고용주보다 더 나쁘다고 볼 수도 있다.

청년에 대한 일자리 배려가 없기는 노동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리해고를 제한하거나 저성과자 해고를 원칙적으로 금지시킨 조치 등은 기존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책들이다. 수혜자는 대부분 중·장년층이다. 청년 일자리가 생길 공간이 줄어든다.

신사업이 기존 사업에 부딪히면 여지없이 깨진다. 기득권의 장벽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타다 금지법’이 대표적이다. 택시 운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타다 운전자들이 일자리를 놓아야 하는 위기다.

신산업 규제 샌드박스는 사업 초기 단계에선 규제하지 않겠다는 ‘선허용-후규제’ 정책이다. 일자리를 활발히 창출할 정도로 사업이 커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각종 규제를 받게 된다.

청년 일자리를 늘리려면 기업이 성장하거나 새로 많이 생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친기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필요하면 예산 및 세제 지원도 해야 한다. 반면 정년 연장은 법만 바꾸면 된다. 기업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눠주는 일이기도 하다. 피해자인 청년은 불특정 다수여서 반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년을 60세로 연장한 지 4년 만에 또다시 나오게 된 배경이다.

노동자의 대변인임을 자처하는 정의당 역시 기득권 노동자들의 권리를 청년층에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자본이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만 편다. 만 20세 청년에게 3000만원을 주자는 정의당 공약은 청년 실업 문제를 놔둔 채 돈으로 해결하려는 전형적인 좌파 포퓰리즘이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절실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소중하다. 문제는 사고의 경직성이다. ‘586’으로 상징되는 학생운동 세력, 노동운동 세력이 젊은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다. 청년층을 외면하는 거꾸로 된 일자리 정책을 이제는 되돌려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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