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초인 아닌 '인간' 베토벤의 흔적들
베토벤 하면 운명을 거역하고 역경을 이겨낸 영웅이란 이미지가 떠오른다. ‘청각장애를 극복한 초인적 작곡가’라는 강력한 서사가 이런 영웅 신화를 지지한다.

《소리 잃은 음악》은 베토벤의 창작 행위와 행적을 악성(樂聖)이나 괴팍한 천재 같은 박제된 이미지에서 탈피해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한다. 지은이는 평생 베토벤의 음악을 연구해온 미국 음악학자 로빈 월리스다. 그에게 이 책을 쓸 영감과 동기를 부여해준 사람은 아내 바버라다.

20대에 악성 뇌종양 수술을 받았던 바버라는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44세에 돌연 청력을 잃었다. 저자는 아내에게 닥친 청력 상실 과정을 10여 년간 함께 겪었다. 바버라가 청력 보조기기인 포켓토커를 쓰는 청력 훈련 과정, 인공와우 이식 수술 후의 청각 학습 과정을 지켜보며 뇌의 소리 인식 메커니즘, 음악의 시각적·물리적 측면을 구체적으로 알아간다.

저자는 이런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베토벤이 남긴 방대한 악상 스케치와 자필 악보, 서간, 필담 노트 등 다양한 기록을 살핀다. 베토벤이 썼던 여러 종류의 피아노와 나팔형 보청기·공명기 같은 ‘청취 기계’도 체험한다.

베토벤은 평생 피아노를 만지고, 펜과 연필로 종이에 음표를 그려가면서 음악을 매만졌다. 청력이 나빠질수록 점점 ‘몸’에 의지해 피아노라는 악기와 소통했다. 악기와의 접촉을 통해 소리를 촉각적으로 경험했고, 진동이 더 잘 전달되는 악기를 찾았다. 베토벤에게 기보 작업은 언제나 “음악을 소리의 세계에서 시각과 촉각의 세계로 옮겨놓는 과정”이었다.

이 책은 뇌종양 재발로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사부곡(思婦曲)’이기도 하다. 베토벤과 바버라는 조금의 소리라도 듣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활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애를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인 채 그 경계를 넓혀가려는 시도였다. 저자는 “바버라의 귀를 통해 베토벤을 들으며, 그의 삶이 영웅적이기보다 인간적이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홍한결 옮김, 마티, 408쪽, 2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