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립 노력 늦춰선 안돼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20일 한국에 수출되는 반도체 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제)를 개별허가에서 특정포괄허가 대상으로 변경했다. 일본이 지난해 7월 시행한 수출규제조치 3개 품목 가운데 포토레지스트를 개별허가 대상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특정포괄허가 대상으로 바꿈에 따라 이 품목의 한국 수출 허가절차는 다소 완화됐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7월 4일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생산 핵심 소재 3개에 대해 수출규제를 시작한 데 이어, 8월 2일엔 한국을 ‘수출절차 간소화 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국제 공급사슬 위험 중 정치적 위험은 저개발국가나 독재국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적 불안정성이라는 공급사슬 위험 요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불만을 표하며 일본 정부가 취한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는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도 공급사슬 붕괴를 고의적으로 시도하는 정치적 위험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됐다.

또 기존 공급사슬 위험 관리상 정치적 위험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경쟁 상품의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 그리고 국가 자주권과 정체성 확보를 위해 다국적 기업의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일본 수출기업의 판로를 제한하는 것으로, 자국 산업의 육성을 저해하는 자해(自害) 정책이다. 실제로 일본이 수출 규제를 단행한 이후 작년 7~11월 5개월간 누계 현황을 보면 한국의 대일(對日) 수출은 7.8% 줄었지만, 일본의 대한국 수출은 14.6% 줄어 한국보다 감소폭이 더 컸다.

우리 정부가 지난해 11월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조건부로 유예한 이후 12월 도쿄에서 한·일 간 관련 국장급 수출규제 관련 회담을 시작했고, 1월에도 이 회담을 이어 갈 계획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의 수출규제 정책은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많은 기업은 이를 통해 한·일 간 무역장벽이 해소되고, 기업 활동도 정상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소재·부품 공급사슬상 가장 중요한 가치인 파트너로서의 신뢰를 스스로 저버렸다. 일본은 언제 또다시 이를 무기 삼아 한국 정도는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오만함을 보일지 모를 일이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완화와 상관없이 일제를 능가하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만들겠다는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많은 기업이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내구성, 정밀도, 안정성을 모두 갖춘 일본 제품이 필요하다고 한다. 반도체, 자동차, 선박, 화학 등 세계적 경쟁력이 있는 주력산업은 물론 중소기업에 필요한 일제 ‘소부장’까지 국산으로 대체할 수 있는 정책은 지속돼야 할 것이다.

기업들도 일본의 수출규제 정책 완화와 관계없이 공급사슬 위험 관리에 기반한 경영을 지속해야 한다. ‘규모의 경제’ 효과를 위해 주 공급자(혹은 공급국)를 이용하면서도 주 공급자의 재해 혹은 횡포에 대응할 수 있도록 대체 공급자를 경쟁적으로 활용하는 ‘7 대 3 구매 전략’이란 공급사슬 위험 관리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생산성 및 원가의 부담이 있더라도 필요한 조치다. 국내 관련 기업들과 협력해 개발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단기적으로 여의치 않으면 해외 공급자까지 발굴, 육성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고맙게도 일본 아베 신조 정부는 적기에 우리 국민과 기업들에 예방주사를 놓아줬다. 이 기회에 국민들에게는 ‘일제(日帝) 망각’이라는 병에 대한 그리고 기업들에는 ‘일제(日製) 의존’이라는 병에 대한 항체가 각각 잘 형성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