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덕동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60대 은퇴자 A씨는 내년부터 주택연금을 받을 계획이었다. 국민연금 외에 다른 수입이 없었지만 아파트 가격이 9억9000만원까지 뛰어 시세 9억원 이하에만 주는 주택연금을 그동안은 신청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난달 ‘내년부터 9억원이 넘는 집도 주택연금을 받게 해주겠다’는 정부 발표를 듣고 A씨는 한국주택금융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답은 “국회에서 법이 고쳐지지 않아 아직 신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A씨는 “3년 새 재산세가 7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뛰는 등 각종 부담이 늘었다”며 “주택연금을 받게 해준다는 정부 말을 믿고 희망을 가졌는데 허무하다”고 했다.

정쟁에 처리 무산된 민생법안
"9억 넘어도 주택연금 받게 해준다" 정부 말만 믿었는데…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인구구조 변화 대응책의 일환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주택 기준을 시세 9억원 이하에서 공시가격 9억원 이하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고령인구 중 주택 외에는 자산이 거의 없는 ‘하우스 푸어’가 늘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주택연금이란 만 60세 이상 주택 보유자가 주택금융공사에 집을 담보로 맡기고 매달 일정액을 수령하는 제도다. 기준이 공시가격 9억원 이하로 바뀌면 아파트의 경우 시세 13억원 정도까지 주택연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가입 기준을 ‘시세 9억원’에서 ‘공시가격 9억원’으로 바꾸려면 주택금융공사법을 개정해야 한다. 개정안은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상정됐지만 관련 논의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정무위 관계자는 “선거법 개정을 둘러싸고 국회가 파행을 겪어 이번 정기국회 내에 소위가 다시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법 개정이 사실상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홍 부총리가 주택연금 가입 대상 확대를 발표한 지난달 주택금융공사에는 11만2157건의 주택연금 가입 상담 신청이 들어왔다. 같은 달 기준으로 작년(10만2644건)과 2017년(8만8875건)보다 상담 건수가 증가했다. 주택금융공사 관계자는 “정부 발표 이후 시세 9억원 이상 주택 보유자가 전화를 거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금융위-기재부 갈등까지

국회 관계자는 “최근 부동산 가격이 급등해 시세 9억원을 더 이상 고가주택이라고 하기 힘들다”며 “종합부동산세도 공시가격 9억원 이상부터 과세하기 때문에 주택연금만 더 깐깐한 기준을 들이댈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주택연금 가입 대상 확대에는 여야 간 이견이 없다”며 “여야 간 정쟁으로 민생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무위 관계자는 “주택금융공사법 개정안이 통과하지 못하는 데는 기재부와 금융위원회 간 갈등도 한몫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주택연금 가입 대상 확대는 금융위 업무지만 지난달 홍 부총리가 관련 대책을 발표한 뒤 금융위 내에서 ‘기재부에 공을 뺏겼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안다”고 했다.

또 다른 정무위 관계자는 “각 부처가 중점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법안이 있으면 부처 간부들이 소관 상임위 의원실을 찾아 협조 요청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금융위는 금융소비자보호법과 신용정보보호법 처리를 최우선 순위에 뒀는데 두 법안이 정무위를 통과하자 주택금융공사법 등에 대해서는 협조를 요청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