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갇힌 '규제 샌드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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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규제 넘으니 또 규제"
180건 대부분 '반쪽 허용'
조건 까다로워 사업성 뚝
승인 사업 타부처가 막기도
180건 대부분 '반쪽 허용'
조건 까다로워 사업성 뚝
승인 사업 타부처가 막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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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껏 뛰놀라더니…'샌드박스'에서도 동네영업만 가능한 '반반택시'
“폭탄을 작은 실험실에서 일단 터뜨려보란 것입니다.”(경제단체 고위관계자)
지난 1월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될 때만 해도 기업들의 기대는 컸다. ‘혁신사업의 물꼬를 틀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시행한 지 300여 일이 지난 지금 ‘규제 혁신의 대표 사례’라고 치켜세우는 정부와 달리 현장의 시선은 싸늘하다. ‘은행 알뜰폰’(은행에 휴대폰 판매 허용) 등 일부 성공 사례도 있지만 대다수 승인 건에 대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다. 까다로운 ‘조건부 승인’ 요건, 규제 실무 부처의 변치 않는 규제 의지, 쟁점 사안에 대한 소극적 심사 등이 규제 샌드박스의 실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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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부 승인으로 사업성이 크게 떨어진 사례는 반반택시뿐 아니다. 공유주방 업체 위쿡은 7월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받았다. 편의점, 대형마트 등에 납품이 가능한 B2B(기업 간 거래) 공유주방이 허용된 첫 사례였다. 하지만 4개월 만에 난관에 봉착했다. 공유주방 음식의 B2B 유통을 서울에만 허용해서다. 공유주방은 ‘전국 단위’ 유통을 원하는 대형마트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해 판로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달 27일 규제 샌드박스로 승인된 ‘내국인 공유 숙박’에도 추가 규제가 달렸다. 내국인을 받으려면 집주인이 반드시 실거주해야 한다. 서울지하철 1∼9호선 역 반경 1㎞ 이내에 집이 있어야 한다. 주택 형태는 단독주택, 다가구주택, 아파트 등 최대 4000곳으로 한정됐다. 영업도 1년에 최장 180일만 가능하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수익을 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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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규제 본능’도 규제 샌드박스를 무력화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접수는 산업통상자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중소벤처기업부·금융위원회 등 4개 부처가 받지만 심의할 땐 해당 사안에 규제 권한이 있는 실무 부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심의 과정에서 규제 부처 공무원들이 어깃장을 놓기 일쑤라는 게 경제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농어촌 빈집 숙박공유 서비스를 추진했지만 사업을 못 하고 있는 ‘다자요’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장애물은 ‘농어촌정비법’에 있었다. 법 조항은 ‘농어촌 거주자’만 민박업을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다자요 측이 규제 특례를 요청했지만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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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사안에 대해선 ‘천수답 심의’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쟁점 사안’을 두고 정부가 이익단체와 협회의 눈치를 보느라 결정을 유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빈 택시를 이용해 작은 물건을 배송하는 서비스를 추진 중인 딜리버리T는 2월 과기정통부에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답을 받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국토교통부가 딜리버리T 측에 화물연대 등과 협의를 하고 ‘긍정적인 의견’을 받아오라고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들이 쟁점 사안에 대해선 책임을 피하려고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원격 의료 등 민감한 사안과 관련해선 규제 샌드박스 신청을 하지 않고 사업을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규제 샌드박스
특정 지역에서 규제를 면제하는 규제 프리존과 달리 새로운 산업 분야의 제품·서비스에 대해 기존 규제를 일정기간 면제·유예해주는 제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모래 놀이터처럼 기업이 규제 없는 경영 환경에서 혁신사업을 해보라는 취지로 도입됐다.
황정수/정인설/고재연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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