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초강경 자세를 보여왔던 일본 정부가 최근 들어 ‘속도조절’에 나선 모습이 뚜렷하다. 수출규제를 대폭 강화했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에 대해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첫 수출허가를 한 데 이어 한국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 발언도 잦아들었다. 이 같은 일본 정부의 변화는 우선 미국이 한·미·일 동맹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본 소재업체들의 우회수출,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 급감, 도쿄올림픽과의 연계 등이 일본 정부를 움찔하게 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1) 동맹 강조하는 미국에 큰 신경

한·미·일 3각 동맹 흔들 '지소미아' 부담됐나…경제전쟁 소강 국면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들은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최근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에스퍼 장관이 지난 9일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이 한·미·일 안보협력에 기여한다고 발언한 것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도쿄 외교가에선 “일본 정부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미국의 동향”이라며 “일본의 보복에 대한 대응으로 지소미아가 파기되면 한·미·일 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그 책임을 일본 정부가 져야 하는 것이 아닌지 신중하게 보는 것 같다”는 분석이 퍼졌다.

일본으로선 지소미아가 연장되지 않을 경우 북한 미사일 등의 발사 초기정보 접근에 제약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미사일 방위시스템에 허점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무엇보다 주한미군, 주일미군을 축으로 한·미·일 간 긴밀하게 연결된 동맹구조가 삐걱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2) 일본 소재업체들의 우회 수출

한·미·일 3각 동맹 흔들 '지소미아' 부담됐나…경제전쟁 소강 국면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 대체 소재 공급처를 찾아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점도 일본이 강경일변도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1일 삼성전자가 벨기에에서 일본이 수출규제를 강화한 포토레지스트를 상당량 조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전직 삼성 간부 출신 소식통을 인용해 “삼성전자가 벨기에에서 포토레지스트를 6~10개월어치 구입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삼성전자에 소재를 공급한 업체로는 일본 JSR과 벨기에 연구센터 IMEC가 2016년 설립한 합작법인 EUV레지스트를 지목했다.

앞서 불화수소 생산업체인 모리타화학공업은 올해 말부터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는 고순도 불화수소를 한국 측 요청이 있으면 중국 공장에서 한국에 공급할 수 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3) 예상보다 더 줄어든 한국인 관광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정부의 생각보다 더 크게 줄어들면서 일본 지방자치단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인 관광객 의존도가 높은 후쿠오카, 가고시마 등 지방지역이 체감하는 위기의식은 더욱 절실하다. 에어서울, 제주항공 등 주요 저비용항공사(LCC)들에는 일본 지자체 관계자들이 찾아 한·일 항공 노선을 유지해 줄 것을 잇달아 요청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올 2분기 일본 관광업계 수익성이 크게 떨어졌으며 한·일 관계 악화는 이 같은 현상을 더 심화시킬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관광객 의존도가 높은 백화점은 매출 증가율이 크게 둔화했고, 관광객 대상 영업 비중이 높았던 화장품 업체의 매출은 급감했다.


(4) 도쿄올림픽에 영향 줄지도 검토

2020년 도쿄올림픽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도 언제든 일본을 움찔하게 하는 아킬레스건으로 꼽힌다. 아키타 히로유키 니혼게이자이신문 논설위원은 기명칼럼에서 “아베 총리실은 당초 한국에 ‘보복조치’로 보이는 강경책을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 했다”며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인의 일본 방문 붐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일본 정부는 특히 한국 정부가 “올림픽 선수단에 후쿠시마산 농산물을 먹이지 않겠다”며 올림픽과 방사성 물질 안전문제를 연계하고 나서자 당혹해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문화체육관광부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단 등에 안전을 위해 한국산 식자재를 직접 공수해 제공키로 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