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 직전까지 치닫던 한·일 갈등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일본은 지난 8일 대(對)한국 수출 규제 품목 중 하나인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의 수출을 36일 만에 허가했다. 하루 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면서도 절차가 까다로운 개별허가 품목을 추가 지정하지 않은 데 이은 조치다. 한국 정부도 이에 화답해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일단 유보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일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일본이 일방적인 무역 보복 조치로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원고를 읽으며 ‘보복’이라는 단어는 뺐다. 일본이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우리 정부도 불필요하게 일본을 자극하지 않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확전을 자제하는 모습은 일단 고무적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감정적 대응보다는 차분하고 치밀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그간 정부 여당의 대응이 국가의 자존심을 내건 일종의 ‘세(勢)몰이’였다면, 이제는 철저한 전략과 실리에 따라 냉철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런 점에서 옳은 방향이다.

한·일 갈등은 어차피 양국 정부가 나서서 정치적·외교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다. ‘죽창가’를 앞세우고 국민들에게 반일(反日) 감정을 부추긴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양국 갈등의 최대 피해자인 기업들을 앞세우는 것 역시 자제해야 한다.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는 결국 기업 몫이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부는 5대 그룹 경영진이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달라”고 호소한 대목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부는 여당과 좌파 성향 단체 일각에서 쏟아내는 과격한 반일 감정 선동과도 거리를 둬야 할 것이다. 그간 청와대와 정부는 한·일 갈등에서 ‘응원단장’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정부가 ‘주전 선수’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점이다. 국가 간 협상에서는 어느 한편의 일방적 완승이나 완패는 있을 수 없다. 정부는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해결 방안들을 포함한 다양한 대안을 검토해 일본과 교섭에 나서야 한다.

여당과 시민단체들도 ‘일본=악(惡), 한국=선(善)’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선동을 멈춰야 한다. 감정 배설은 될지 몰라도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 대통령 말마따나 “결국은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승자 없는 게임”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정부는 한·일 갈등은 물론 이를 둘러싼 국내 갈등까지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념이나 정파가 아닌, 오직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성숙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정부의 갈등 관리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