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신흥국 금융시장에 대해 ‘비중 축소’로 입장을 속속 바꾸고 있다. 작년 4분기에 신흥국 금융시장에 대한 ‘비중 확대’ 투자의견을 낸 지 반년 만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신흥국 각각의 불확실성이 확대됐다는 점을 근거로 꼽고 있다.
"신흥국서 돈 빼라"…말 바꾼 글로벌 투자사들
미·중 무역분쟁이 신흥국 직격탄

2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MSCI 신흥국지수는 이달 들어 지난 16일(현지시간)까지 7.67% 하락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중심으로 구성된 MSCI 월드지수가 같은 기간 2.85% 떨어진 것과 비교하면 큰 낙폭이다.

미·중 무역전쟁 등의 여파로 신흥국 통화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글로벌 자금이 신흥국 증시에서 발을 빼면서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분석이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뜻하는 달러 인덱스는 지난 17일 97.852로 장을 마쳐 4월 이후 1.03% 올랐다.

신흥국 시장에 대해 가장 먼저 부정적 의견을 밝힌 곳은 골드만삭스다.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은 신흥국 시장의 통화 및 부채에 대한 투자비중을 미·중 무역전쟁과 글로벌 경제 성장둔화에 대한 불확실성이 걷힐 때까지 축소한다고 지난 16일 발표했다. 모건스탠리 전략가그룹도 미국이 중국에 대한 추가 관세를 부여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흥국 시장은 하락폭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17일 투자자들에게 밝혔다.

브라질 등 남미 국가에 대한 시각은 특히 부정적이다. 스페인 투자은행(IB) BBVA의 알레한드로 콰드라도 시니어 전략가는 “신흥국 통화가치가 많이 싸졌지만, 불확실성이 여전히 커서 투자수요는 많지 않다”며 “브라질 헤알과 칠레 페소 가치가 더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브라질에서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조사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되면서 정치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글로벌 자금 신흥국에서 이탈 ‘촉각’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 주식시장에 대한 순매도 전환도 신흥국 ‘비중 축소’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외국인들은 유가증권시장에서 지난 9일부터 7거래일 연속 ‘팔자’에 나서 이 기간에 총 1조4992억원을 순매도했다.

글로벌 펀드정보업체 이머징마켓포트폴리오리서치(EPFR)의 최근 조사(5월 9~15일)에 따르면 글로벌 신흥국(GEM) 주식형펀드에선 작년 6월 이후 최대인 총 28억1900만달러(약 3조3701억원)가 빠져나갔다. 전균 삼성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6월은 미국의 1차 중국에 대한 관세부과가 있었던 시기로 이후 4개월간 신흥시장에서 자본유출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글로벌 금융투자사들이 일제히 비슷한 내용의 코멘트를 내놓는 데엔 미국 월가 저변에 흐르는 정서가 반영된 것”이라며 “글로벌 투자자금이 그들의 언급 전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인상 우려 등의 여파로 ‘공포장세’가 연출된 지난해 9~10월에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JP모간 등은 신흥국 증시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이 지나치게 낮아졌다며 비중확대 의견을 냈다. 이후 올해 초 Fed가 금리인상 속도 조절을 공식화하자 중국 등 주요 신흥국 증시는 단기간에 급반등했다.

“여전히 저평가” 긍정론도 있어

신흥국 시장에 긍정적 시각을 유지하는 곳도 있다. 신흥국 실적 전망이 선진국보다 낫고, 밸류에이션은 저평가됐다는 이유에서다. 대신증권에 따르면 MSCI 신흥국지수 기준 신흥국 증시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주가/주당순이익)은 11.9배로, 선진국(15.3배)에 비해 낮다. 올해 신흥국 주당순이익(EPS:순이익/주식수) 예상 증가율은 4.8%로, 선진국(4.1%)보다 높다.

제인 브로어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연구원은 “상당수 투자자는 최근 미·중 갈등이 결과물을 도출하기 앞서 마지막 진통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협상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신흥국·선진국 증시 간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