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베네수엘라 정권을 지지하는 쿠바를 압박하기 위해 23년간 사문화된 법조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17일(현지시간) 1959년 쿠바 공산혁명 이후 자산을 몰수당한 미국인이 이 자산을 이용하는 외국인과 외국 기업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낼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과거 쿠바에 투자한 미국인과 쿠바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뒤 미국 시민권을 딴 쿠바계 미국인들이 쿠바 정부에 뺏긴 자산에 대해 손쉽게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소송은 다음달 2일부터 가능해진다. 미 국무부는 약 20만 건, 금액 기준으로는 수백억달러 규모의 소송 제기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번 조치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6년 3월 제정된 ‘헬름스 버튼 법’을 근거로 한다. 이 법은 몰수 자산을 통해 이익을 얻는 기업 등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도록 했다. 역대 미 행정부는 이 ‘소송 조항’의 효력을 계속 정지시켜 법조문을 사실상 사문화했다. 소송이 벌어질 경우 쿠바에 투자한 유럽, 캐나다, 일본 등 동맹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관행을 깨고 이번에 ‘소송 조항’의 효력을 복원했다. 쿠바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지지하는 데 대한 보복 차원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을 불법선거로 탄생한 정권으로 규정하며 야권 지도자로 ‘임시 대통령’을 선언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캐나다는 즉각 반발했다.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이) 쿠바 관련 조치를 (자국) 영토 밖에서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EU는 특히 미국이 쿠바에 투자한 EU 기업을 제재하면 보복할 계획이라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송금과 여행을 제한하는 조치도 이날 내놨다. 이와 함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제재 방안도 발표했다.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거래와 달러화에 대한 접근을 더 차단하기로 했다. 니카라과에 대해선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의 비자금 창구로 의심받는 금융 서비스 업체 ‘뱅코프’를 제재하기로 했다. 존 볼턴 백악관 보좌관은 이날 플로리다주의 한 행사에서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등 ‘폭정 3인방’이 무너지고 있다”며 “(외부 세력의 미주대륙 간섭을 거부하는) 먼로 독트린은 살아있으며 미국은 독재자들의 생명줄을 빼앗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앞마당’인 중남미를 확실히 단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분석된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