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영국 없는 EU는 번영의 길 걸을까
영국 의회가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EU)의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합의안을 부결시켰다. 또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 대신에 오는 29일인 브렉시트 발효 시한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의 효력은 EU와의 합의를 기다려야 하지만, 어쨌든 영국이 EU를 떠나는 것은 확실하다.

브렉시트가 영국 무역에 주는 타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세계무역기구(WTO) 등 자유무역을 위한 국제조약이 적용되고, 특히 영국 정부가 ‘비밀계획’대로 관세·수입할당 등을 타국과의 협정이 없이 철폐하는 ‘일방적인 자유무역’을 선언한다면 노딜 브렉시트도 우려할 문제는 아니다(본지 2016년 10월 28일자 다산 칼럼 참조).

진정 우려할 문제는 ‘영국 없는 EU의 장래’다. 자유와 경쟁을 중시하고 시장지향적·분권적 체제를 선호하는 게 애덤 스미스 전통의 영국이 아니던가!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중앙집권적인 국가 통제를 중시하는 프랑스 장 바티스트 콜베르 전통의 세력과 맞서 싸울 만큼 강력한 대항세력이 EU에는 더 이상 없다. 프랑스 정부가 EU위원회와 EU의회를 통해 중앙집권적 초(超)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개혁을 밀고 나갈 수 있게 된 건 그래서다. 대표적인 예가 에어버스, 지멘스-알스톰 철도부문 합병 등 세계 챔피언급 기업을 육성하고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산업정책이다. 그러나 경쟁으로부터 보호받는 챔피언은 혁신 노력을 소홀히 해 결국은 경쟁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EU 회원국에 독자적인 조세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일원화하는 개혁 역시 EU 초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EU의 조세 일원화는 기업하기 좋은 입지를 제공하려는 국가 간 경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며, 그 결과 효율적 조세제도를 발견하는 절차로서의 경쟁은 소멸된다.

프랑스가 좋아하는 개혁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은행 부채에 대한 집단 책임을 맡을 은행연합 △재정 위기로부터 유로 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재정·금융지원 형태의 유로화 구제책 확충 △유럽 차원의 실업보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재정·경제 정책에 대한 EU 개별회원국의 책임을 약화시키고 다른 회원국까지도 함께 책임지게 만드는 재분배적 이전지출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제도는 유로 국가가 각자 자기 책임하에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재정·경제정책을 추진할 인센티브를 왜곡한다.

영국을 EU에 묶어두지 못해서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을 나라는 프랑스다. 세력 확대 전쟁에서 승리를 목전에 두고도 영국의 저항·외교·돈 때문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게 프랑스의 굴욕의 역사다. 1, 2차 세계대전 때 영·미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도움을 받았던 것도 프랑스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다.

자신의 주도로 EU 초국가를 만들겠다는 프랑스의 결의에는 그것이 영국(그리고 미국)을 이겨 역사적으로 쌓인 굴욕을 씻고 자존심을 세우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선언한 ‘유럽의 새로운 시작’도 마찬가지다. 거대 단일 유럽국가를 통해 영국의 개입 탓에 수포로 돌아간 1815년의 ‘나폴레옹의 꿈’을 실현하려는 의도가 밑바탕에 있다.

영국이 EU를 떠나면 프랑스는 정책·제도의 획일화, 책임의 공유, 초국가 형성 등의 방향으로 EU를 신속히 개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유와 번영이 아닌 빈곤과 노예의 길이다. 안타까운 건 이런 프랑스를 도와주는 덩치 큰 독일의 태도다. 발터 오이켄이 개발했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가 실행했던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는 어디로 갔나. 경쟁·시장·분권을 중시하는 질서 자유주의 덕분에 전쟁의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지 않았는가.

EU는 협상 과정에서 영국의 탈퇴를 범죄처럼 취급했다. 브렉시트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자유, 자기책임, 시장경제, 분권화의 방향으로 EU를 개혁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방향의 개혁을 통해서만 EU 회원국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번영을 향유할 수 있다. 영국 없는 EU는 자유의 가치를 되새겨야 할 한국 사회에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