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기 모양의 앰풀, 크레용 같은 립스틱, 딱풀 모양의 선크림, 유명 패션 디자이너 제러미 스콧의 그림이 그려진 립 팔레트…. H&B 스토어에 들어서면 장난감 가게를 방문한 듯한 착각이 든다. 밋밋한 플라스틱 병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능과 디자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용기가 차별화가 어려운 화장품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화장품을 기획하기 전에 내용물보다 용기를 먼저 선정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트렌드 덕에 국내 1위 용기업체 연우는 지난해 4분기 전년 동기 대비 20.9% 증가한 매출(704억원)을 올렸다. 분기 기준 사상 최대다.
容器의 마술…화장품 新시장을 만든다
1조원 수준으로 커진 용기 시장

화장품 용기 역사를 바꿔 놓은 제품은 2008년 아모레퍼시픽에서 나왔다. 쿠션 파운데이션이다. 메이크업 베이스와 파운데이션, 선크림 등을 특수 스펀지 재질에 흡수시켜 팩트형 용기에 담았다. 액체 파운데이션을 쓰면 화장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문제점에 착안해 개발된 이 제품은 출시되자마자 대박을 쳤다. 최근 누적 판매량 1억 개, 연 매출 1조원 규모를 넘어섰다. 용기가 1조원 규모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 관계자는 “15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화장품 용기 개발은 독일, 일본이 맡았지만 최근 국내 업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K뷰티 열풍의 인프라 역할을 하는 용기업체들의 기술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연우가 개발한 에센스용 ‘셀프로딩 드로퍼’다. 보통 에센스 용기는 뚜껑에 달린 고무 부분을 누르면 내용물이 스포이드 관에 빨려 들어간다. 셀프로딩 드로퍼는 뚜껑을 닫을 때 자동으로 내용물을 흡입해 바로 쓸 수 있다. 이제품은 랑콤의 간판 에센스 제품인 제니피크 용기로 쓰인다. 모든 제니피크 용기는 연우가 제조한다. 이 제품은 2015~2018년 4년간 1927만 개가 나갔다. 이 용기는 랑콤과 연우 양측에 전환점을 마련해 줬다. 랑콤은 이 제품으로 경쟁자인 에스티로더의 ‘갈색병 에센스’에 빼앗긴 점유율을 회복했으며, 연우는 ‘용기 신흥국’ 강자임을 입증했다. 연우는 이외에도 튜브를 누를 때 앰풀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드로퍼 튜브’(누적 판매량 1020만 개) 등 신제품을 개발해 새 시장을 만들었다.

3000만 개 팔린 에어리스 콤팩트

국내 2위인 펌텍코리아도 지난해 매출이 1500억원에 이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펌텍은 2009년 ‘에어리스 콤팩트’라는 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팩트 케이스 안에 작은 구멍들을 뚫어 버튼을 누르면 구멍에서 파운데이션이 필요한 만큼 나온다. 양 조절이 가능하고 위생적이라는 장점 때문에 2010년 LG생활건강의 캐시캣 ‘찰크림파운데이션’에 처음으로 공급했다. 이후 에스티로더 등 글로벌 브랜드에 납품을 성사시켰다. 지금까지 3000만 개 이상 팔렸다.

펌텍이 2002년 개발한 ‘펌프튜브’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치약처럼 생긴 튜브 제품에 펌프 용기를 붙였다. 미샤의 ‘시그니처 BB크림’이 대표 적용 제품이다. 출시 후 5000만 개 이상 팔렸다. 데오도란트에만 사용하던 스틱 용기를 국내 최초로 선크림에 적용한 것도 펌텍이다. 막대 용기에 선크림을 넣기 위해 선크림을 고체로 만들었다. 이 제품도 2014년 출시 이후 1000만 개 이상 팔렸다. 회사 관계자는 “수십 개 글로벌 업체들이 1주일에 한 번꼴로 펌텍을 방문해 용기를 찾는다”고 전했다.

용기 디자인을 위해 디자이너나 캐릭터,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도 늘고 있다. 토니모리는 키르시, 모스키노 등 다양한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내놓았다. 맥은 패션 디자이너 제러미 스콧과 협업해 독특한 화장품 케이스를 내놓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