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 시나리오는 1934년 6월16일 서울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가 열렸다는 사료 한 줄을 기반으로 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조선 최초의 패션쇼를 이야기로 끄집어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미군에 생포된 독일 나치군 포로 중 동양인 모습이 찍힌 실제 사진 한 장으로 출발한 강제규 감독 영화 ‘마이웨이’와 비슷하다. “국문학과에서 근대 문학을 공부하며 신여성을 다룬 잡지와 소설을 많이 접했어요. 수업시간에 이를 가지고 영화 시놉시스를 짜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한 여자 선배가 의복감상회 이야기를 들고나온 거예요. 수업 후 그대로 묻히는 게 너무 아까워 시나리오로 써보겠다며 잡고 나왔죠.”
대학 4학년이지만 취업 대신 드라마작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휴학을 선택했다. 휴학 전 영화제작사 ‘문와처’에서 2년 동안 서포터즈로 활동했던 그는 시나리오 모니터링, 영화 기획안 발표 등을 통해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차근차근 키워오던 터였다. 그 덕에 이번 당선작 기획안을 이 영화사 프로듀서에게 앞서 보여줄 기회도 얻었다. 그는 “시나리오 초보인 내게 PD가 매우 좋은 소재라며 꼭 지원해보라고 말해줘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씨는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주인공’을 시나리오 전면에 내세웠다. 여성 기자와 여성 독립운동가, 여성 디자이너 등 당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이야기를 이끈다. 그는 “이 시나리오 소재가 신선했던 건 그 당시 직업을 가진 여성에 대한 서사를 다룬 영화가 없다 보니 희소성이 컸기 때문”이라며 “여성 주연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영화 ‘오션스8’에서처럼 여성 캐릭터들이 주체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꼭 그려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고 하지만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자기관리를 잘하고 똑똑한 모습으로 프로답게 소신을 지켜간다면 여성들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지켜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80여 년 전 이야기를 담아내야 했던 어려움에 대해 고씨는 “시나리오를 쓸 때 머릿속으로 자기만의 영상을 재생해봤다”고 말했다. 그는 “쓰면서 ‘다음 장면은 뭘 넣지?’ 생각하면 막막했지만 장면에 맞는 색도 넣어보고 인물들도 튀어나오게 하다 보면 내가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즐거웠다”고 덧붙였다.
작가로서 꿈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작가라뇨. 당선됐다고 작가는 아니죠. 소설이면 책으로 읽히고 시나리오는 영화로 완성돼 관객에게 보여야 그제야 작가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뗀 만큼 앞으로 여러 인물이 갈등 속에서도 연대하고 목표를 이뤄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요.”
■시나리오 당선작 '경희' 줄거리
심히 화려하고 심히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인. 그 여인의 눈에는 옷, 옷뿐이다. 재봉사인 경희는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경성(京城)의 유행이 시작되는 곳, 1934년 명동의 ‘명동 양장점’엔 재봉사 ‘경희’가 있다. 미국 유학 후 돌아온 패션 디자이너 ‘수훈’의 밑에서 ‘정아’, ‘점순’과 함께 재봉사로 일한다. 그는 조선 최초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를 꿈꾼다.
그런 경희에게 반해 찾아오던 모던보이 현우는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경희의 타고난 재능을 이용하던 수훈은 그 사실을 알고 경희에게 4년 뒤 미국에서 열리는 패션쇼를 같이 준비하자고 한다. 현우와 수훈의 제안 사이에서 고민하던 경희는 결국 수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4년 동안 여러 연회를 준비하며 명동 양장점은 경성 최고의 양장점이 된다. 경희는 자신의 옷이 사랑받고 있음에 기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거리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인 ‘경희’가 아니라 ‘수훈’을 기억하는 현실을 체감하게 된다. 이전부터 자신이 고안한 디자인을 수훈이 묘하게 바꿔 자기 작품인 양 사람들에게 선보여왔기 때문이다. 경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거둬줬던 수훈을 믿고 싶어 하는데….
드디어 정식으로 초대받아 한 연회에 참석하게 된 수훈과 경희. 경희는 자신의 디자인이지만 자신이 만들지 않은 옷들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수훈이 자신의 디자인만을 가져가 다른 재봉사들에게 똑같이 만들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훈이 4년 전 약속했던 미국에서의 패션쇼 역시 거짓말로 드러난다. 경희는 분노하며 수훈의 양장점을 그만둔다. 하지만 수훈의 계략으로 경성 내 어느 양장점에도 취직하지 못한 경희는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가 돼 버린다.
한편 언론인 ‘채령’은 모던 걸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바꿔볼 이벤트를 기획하고, 조선 최초의 여성 패션쇼인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를 준비한다. 채령은 새로운 디자이너를 찾아 다녔고, 마침 일자리를 잃은 경희는 조선의 옷을 현대에 맞게 개량한 ‘새로운 옷’들을 선보이기 위해 채령과 뜻을 같이한다. 과거 함께 일했던 점순과 정아를 설득해 이들과 힘겹게 의복 감상회를 준비한다. 하지만 그들을 지원해주던 ‘협회’는 돈이 다 떨어지고, 수훈은 또다시 경희의 디자인을 훔친다. 경희는 자신의 이웃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승효’를 도와준 사실 때문에 순사들에게 쫓긴다. 그럼에도 경희는 포기하지 않고 의복 감상회를 약속한 날에 선보이는데, 승효는 피를 흘리며 순사들에게 쫓긴 채 의복 감상회장으로 숨어든다.
경희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의복 감상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
■당선 통보를 받고
"당선 됐다고 작가라뇨, 영화 완성돼야 작가죠"
지하철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었다. 전화 한 통으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어 하다가, 신나기도 하다가 끝내 스스로 반성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많기에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 어렵다. 용기와 확신이 부족하던 나에게 많은 분들이 전한 한마디 말은 원동력이 돼 이번 시나리오를 완성하게 했다. 어린 나를 응원해준 가족, 친구,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내게 주어진 이 기회, 더 많이 쓰고 노력하겠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첫 순간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중학교 때 피자빵을 먹기 위해 참여했던 백일장에서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글을 쓰는 내내, 심장이 쿵쿵 하고 뛰었다. 그저 어느 날, 어느 평범한 날에 심장이 뛰었다고 해서 그 순간이 특별해진 건 처음이었다.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글을 써보고자 한다. 영화 시나리오는 이제 두번 써봤기에 정말 초심자의 행운이 내게 온 것 같다. 이번 기쁨을 만끽하겠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겠다. 스스로 ‘정말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완성하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달려보겠다. 정말 감사하다. 추운 겨울, 서로의 온기로 모두의 밤이 따뜻하길.
고혜원 씨는 △1996년 서울 출생 △연세대 원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중
■심사평
윤종호 시네마허브 대표
이미지 아폴로픽처스 대표
황진미 영화평론가 전근대적 억압서 벗어나는 여성…현대의 페미니즘 담론 담아내
총 147편의 응모작 중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경희’가 선정됐다. 경희라는 인물이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대다수 여성이 한복을 입던 시대에 ‘모던 걸’들의 양장을 만드는 ‘명동 양장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경희가 자신의 재능을 착취하던 남성 디자이너에게 맞서 조선 최초의 패션쇼를 열기 위해 분투한다.
경희의 조력자들도 모두 여성이다. 패션쇼 기획자는 여성 언론인이고, 경희와 함께 패션쇼를 준비하는 이들도 ‘명동 양장점’에서 같이 재봉사로 일했으나 경력이 단절돼버린 친구들이다. 전근대적인 억압 구조에 맞서 자아실현을 꿈꾸는 한 여성이 다른 여성들과 연대해 성장하는 서사는 단지 1930년대를 풍속사적으로 소비하려던 여타 작품들과 달리, 현재 한국 사회에서 들끓는 페미니즘 담론을 포괄해낸다.
즉, 근대의 시작이었던 1930년대를 소환한 이유와 현재 여성 관객들이 오늘날에도 겪는 문제로 공감하는 현재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다. ‘경희’는 갈등이 다소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기획 의도와 발상이 워낙 좋기 때문에 사건과 조연을 보강하는 작업을 통해 추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경민의 ‘호환’도 심사위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필력이 뛰어나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호환과 창귀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사람들을 운명에 옭아매는지 잘 표현했다. 다만 지금 관객들에게 호랑이가 어떤 아우라를 지닐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감점 요인이 됐다. 응모한 모든 작가에게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