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부터 폐암과 췌장암 체외진단 키트를 개발하고 있는 의료기기업체 A사는 2020년 초 미국 시장에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병원에서 임상도 진행 중이다. 차세대 염기서열분석(NGS) 등 최신 장비보다 진단 시간과 비용이 10분의 1밖에 안 든다. 기존 진단키트 제품보다 정확도는 100배 높다. 이 같은 혁신제품이지만 국내 출시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A사 관계자는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낭비될 것으로 판단해 국내 출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국내 헬스케어 업계 '코리아 패싱' 확산
국내 헬스케어업계에 ‘코리아 패싱’ 바람이 불고 있다. A사처럼 국내 출시 계획 없이 해외 시장 진출에 집중하는 헬스케어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개인용 복부비만 측정기를 개발하는 인핏앤컴퍼니, 뇌졸중 환자용 재활 플랫폼 ‘라파엘’을 개발한 네오펙트 등도 미국 시장에 제품을 먼저 출시하기로 했다.

인핏앤컴퍼니는 내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거쳐 판매에 나설 계획이다. 근적외선 방식으로 손쉽게 복부지방을 측정할 수 있으며 앱(응용프로그램)으로 위험도를 분석해주고 운동이나 음식 조절 가이드도 받는 혁신적인 서비스지만 국내 판매 계획은 아직 없다. 네오펙트는 뇌졸중 환자 재활 치료를 전화 및 화상으로 제공하는 원격의료 서비스를 미국에서 제공할 예정이다. 원격의료가 불법인 국내에선 서비스 계획이 없다.

유전자 검사 서비스 업체들도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메디젠휴먼케어는 중국에 합작사를 설립했고 필리핀, 베트남 진출도 추진 중이다. 국내에서는 소비자 의뢰 기반 유전자검사(DTC)가 피부 탈모 등 12개 항목으로 제한돼 있어 시장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안저 검사기기를 개발한 루티헬스, 안질환 유전자 진단 기업 아벨리노 등도 미국 시장 진출을 우선 추진하고 있다.

헬스케어업계에 코리아 패싱 움직임이 활발한 데는 시장은 작은데 규제는 까다롭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의료기기 시장은 한국이 58억달러지만 미국은 1549억달러로 26배 크다. 하지만 규제는 한국이 훨씬 까다롭다. 국내에서 의료기기를 출시하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고도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신의료기술평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급여여부 평가를 추가로 거쳐야 한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비급여도 이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1년도 안 걸리는 허가 절차가 국내에서는 2~3년 넘게 소요되는 게 예사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헬스케어 기업들이 활발하게 해외로 진출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과도한 규제 등의 이유로 국내 시장을 외면하게 되면 국내 환자들이 혁신의료기술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빚어질 것”이라고 했다.

임유 기자 free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