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어음제도 폐지 논란

[뉴스의 맥] 사용 줄어드는 약속어음, 폐지가 능사 아니다
약속어음제도 폐지 방안이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다. ‘전자어음으로의 일원화→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어음결제 폐지→약속어음제도 폐지’의 로드맵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2020년 약속어음제도 폐지를 목표로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를 중심으로 ‘약속어음 단계적 폐지 기반 구축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공약 사항이다. 어음은 유래가 깊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 은행업은 보관은행의 역할을 했다. 상인이 은행에 금을 맡기면 은행은 금의 무게를 명시한 금 보관증서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무거운 금 대신 유통이 가능한 어음으로 발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객주(客主)를 중심으로 어음이 사용됐다. 주화 대신에 대략 가로 1촌5푼(1촌=3.03㎝, 1푼=0.3㎝), 세로 4촌5푼 정도의 한지(韓紙) 중앙에 금액을, 양쪽에는 작성한 날짜를 적고, 가운데를 세로로 잘라 객주(채무자)의 이름이 적힌 쪽(右契)은 소지인(채권자)이, 다른 쪽(左契)은 객주가 보관했다. 양쪽을 맞춰서 잘린 부분이 들어맞으면 객주가 돈을 지급했다.

오늘날에는 기업 간 결제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기업 간 대금 결제의 약 21%가 약속어음을 주고받는 것으로 이뤄지고 있다.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약속어음 결제 규모는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 어음·수표 결제금액 기준으로 하루 평균 20조6000억원, 약속어음만은 하루 평균 2조5150억원이 결제됐다.

약속어음은 중소기업, 소상공인의 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되면서 폐지 주장이 제기돼 왔다. 2016년 7월 중소기업중앙회가 판매대금으로 어음을 받는 중소기업 500곳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로, (1) ‘결제기일 장기화로 인한 자금운영 애로’라고 답한 비율이 78.1% (2) ‘어음 부도로 인한 자금 미회수’가 58.1%, 그리고 (3) ‘할인수수료 비용과다’가 26.0%였다. 하도급법상 어음할인료는 발행자가 부담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납품기업인 중소기업이 이 할인료를 부담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요컨대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납품하면 현금 대신 약속어음을 받는데, 이것이 평균 109.7일 동안 현금화되지 않아 장기간 현금이 돌지 않고, 금융회사를 통해 현금화하더라도 할인료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이 공제되며, 심지어는 부도가 나 어음이 휴짓조각이 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현실이다.
[뉴스의 맥] 사용 줄어드는 약속어음, 폐지가 능사 아니다
어음은 신용·지급 수단일 뿐

그러나 약속어음제도 폐지론은 ‘외상거래’라는 본질을 놓치고 어음제도만 탓하는 꼴이다. 마치 5만원권 지폐가 뇌물 공여에 널리 이용되니 아예 5만원권을 없애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부실한데 약속어음제도만 폐지한다고 해서 중소기업의 자금 사정이 호전돼 자금 수급이 원활해질 리 없다. 어음은 신용과 지급을 위한 수단일 뿐이므로 그 자체가 좋고 나쁘고가 없는 것이다.

(1) 결제기간은 현재 자금이 없는 어음 발행인이 어음에 적힌 만기일께에는 자금이 마련될 것으로 예측해 정한 기간이다. 자금이 풍부하다면 어음을 발행할 이유가 없다. 결제기간이 길다는 것은 어음 때문이 아니라 발행인에게 돈이 없어서다.

(2) ‘어음 부도로 인한 자금 미회수’ 문제도 그렇다. 자금이 없기 때문에 부도를 내는 것이다. 만기일쯤에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봤는데,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이는 어음 발행인의 잘못된 예측 때문일 수도 있고, 경제 전반의 문제일 수도 있다. 고의 부도, 연쇄 부도의 위험이 있고, 어음 발행 기업의 부도 시 거래기업이 경영 성과와 무관하게 흑자부도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도 같다. 사실 돈이 없으면 물건을 사지 말아야 하고 납품업자도 납품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현실은 어느 쪽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문제인 것이다.

(3) ‘할인수수료 비용과다’ 문제도 어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할인료 부담 문제다. 하도급법에서는 할인료를 중소기업에 부담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를 위반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상의 문제인 것이다. “약속어음제도는 외상매출에 따른 ‘기한의 이익’은 구매기업이 보는 반면 어음 할인료나 구매기업의 부도 위험이 판매기업에 전가되는 비정상적인 제도”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는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고 제도 자체가 본래 그런 것은 아니다. 기한의 이익을 보는 만큼 이자가 어음금에 가산돼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이고, 본래 할인을 하든 말든 그것은 소지인이 판단할 문제이며 어음제도 자체가 비정상적이고 괴상한 제도인 것은 아니다.

일부 中企 자금경색 우려도

약속어음은 담보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의 단기 신용창출과 현금화 수단이다. 물품대금을 어음으로라도 받아 금융회사에서 할인해 현금화하는 것이 외상장부만 믿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 약속어음제도를 폐지하면 현금성 결제수단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자금 경색이 일어나고 상거래가 위축될 수 있다. 실물경제 위축을 초래하고 경제성장률이 저하되며 이자율 상승 등 금융시장 왜곡을 가져올 수도 있다. 현금 결제 비중이 늘어나고 통화량이 증대돼 인플레이션에도 영향을 준다. 기업어음(CP)·무역어음·표지어음과 같이 투자증권화한 어음도 발행 근거를 잃는다.

어음법은 환어음과 약속어음 두 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환어음은 무역에서 쓰이는데, 모든 나라가 사용하는 국제결제수단이므로 우리만 폐지할 수 없다. 환어음은 두고 약속어음만 폐지하겠다는 것도 문제다. 무엇보다 1807년 ‘나폴레옹 상법전’에 어음을 규정한 이래, 세계 각국이 조약을 통해 어음법을 통일해 약속어음을 제도화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 이 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갈라파고스 규제가 된다. 어음의 오남용, 해이해진 시장 규율, 느슨한 하도급법 집행의 문제인 것이다.

외국에서는 약속어음을 한국처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현금 결제가 많으며 외상의 경우, 외상매출채권 팩토링(factoring: 납품기업이 받은 외상매출채권을 팩터(은행 등 금융회사)가 매입해 중소기업의 단기자금 회전을 돕는 제도)이 활성화돼 있다. 그렇다고 약속어음제도를 폐지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에서도 약속어음으로 물품대금을 결제하는 관행을 점차 없애야 한다. 할인료를 중소기업에 부담시키는 관행, 하도급법 위반행위도 근절해야 한다. 그렇다고 어음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중요한 금융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것이 된다.

할인료 中企 부담 관행 근절돼야

약속어음 부도에 대해 형사처벌도 논의되고 있다. 사실 채무 불이행에 대해 사기가 아닌 이상 채무자를 형사처벌로 제재하는 것은 사회 정의에 반(反)한다. 수표의 경우는 부정수표단속법에 따라 처벌하는데, 그것은 수표는 돈이 있는 사람이 ‘지급’을 목적으로 발행하는 ‘지급증서’이고, 약속어음은 돈이 없는 사람이 나중에 주겠다고 ‘약속’하는 ‘약속증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약속 위반을 모두 범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 다만, 일정 금액 이상의 부도, 고의 부도 및 피사취부도와 같이 사기성이 명백한 경우에 제한적으로 부도수표와 같이 형사제재를 검토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