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없는 WTO 준비해야"…WTO 분쟁해결기구 빈자리 지속

외국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미국의 관세 폭탄으로 세계무역기구(WTO)가 존폐 위기에 몰리고 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8일 보도했다.

WTO는 보호무역의 확산과 함께 내부적 결함, 중국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라는 몇 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1995년 이 기구 창설을 주도했던 미국이 관세 폭탄을 터뜨리면서 그 근거가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WTO 지지자들조차도 이 기구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WTO 규정을 활용해 미국에 보복을 가하면 이 기구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고 반대로 WTO 규정을 우회하면 그 존재 자체를 허물 위험이 있다.

EU 측이 신속한 보복에 나설 것을 다짐하면서 적법성을 강조했지만 EU 일각에서는 WTO 규정을 벗어나 보복에 나선다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영역으로 발을 딛는 셈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WTO는 미국을 비롯한 회원국들이 분쟁의 해결을 맡긴 덕분에 지금까지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접근법에 의문을 제기했고 EU의 맞대응도 결국은 이에 도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지적이다.

향후 국가안보를 내세운 미국의 관세폭탄에 대해 WTO가 판정을 내리더라도 보호무역 정책의 허점을 더욱 키우거나 회원국들을 소외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

WTO 비판세력은 회원국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경제개혁을 미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무역규칙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 주도 자본주의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삼고 있다.
트럼프 관세 후폭풍 WTO로 향해… 기구 존폐 위기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WTO 탈퇴까지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은 지난 4일 WTO가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을 경우에 탈퇴를 결정할 가능성을 굳이 배제하려 하지 않았다.

외교관들은 관세 폭탄을 맞게 된 국가들의 다양한 대응이야말로 WTO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과 호주, 한국 등이 맞보복 대신 외교 채널을 통해 미국의 선처를 구하고 있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면제를 받기 위해 로비를 벌이고 있고 EU를 대표해 백악관을 방문한 스웨덴 총리조차도 특별 대우를 요망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EU가 미국에 대해서는 유독 냉정했다"고 말하며 이를 거부했다.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확전의 의사는 없지만 침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향후 수주일 안으로 WTO 규정에 부합하는 조치들을 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내세운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 법적 근거가 WTO 규정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해 심각한 의문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동맹들이 궁금해하는 근본적인 의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WTO를 통한 분쟁 해결을 바라는지 여부다.

이에 대해 많은 통상 전문가들은 국가안보를 내세운 것 자체가 WTO를 우회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보고 있다.

WTO 사무총장과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을 역임한 파스칼 라미는 이런 예외적 조치가 철강이나 알루미늄, 군화 등에 적용되는 등 미국 측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지 여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라미는 EU통상 담당 집행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2002년에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외국산 철강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자 WTO에 제소, 승소 판정을 얻어냈다.

그는 당시에는 양측이 WTO 규정에 따르고 있었지만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하는 "지금은 우리가 같은 행성에 살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WTO 회원국들은 미국이 없는 WT0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WTO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비난은 이 기구의 분쟁해결 시스템에 집중돼 있다.

번번이 불리한 판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국 통상법의 집행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것이 미국 측의 불만이었다.

물론 WTO가 출범한 이래 미국이 통상 관리들과 의원들은 거의 반복적으로 WTO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에 들어와서 더욱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과거 행정부와의 차이점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은 두 가지 방향을 취하고 있다.

하나는 WTO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관세를 매기기 위해 사문화된 미국법을 꺼내 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 요구하는 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WTO 분쟁해결 기구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WTO 분쟁해결기구의 신규 위원 지명을 계속 지연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7인의 위원 가운데 3인의 자리가 아직도 공석으로 남아 판정을 기다리는 분쟁 사안들이 갈수록 쌓여만 가는 형편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