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 관객들이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공연계의 성폭력에 반대하고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폭로를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공연계의 성폭력에 반대하고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폭로를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배우 이명행, 연출가 이윤택의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습니다. 관객들의 이런 애정이 그들을 더 괴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죄책감이 들어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연극·뮤지컬 관객 #위드 유(with you) 집회’에서 연극 애호가 김모씨는 이같이 말했다.

공연계 ‘미 투(me too·나도 당했다)’ 확산에 관객들이 직접 거리로 나섰다. 공연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백과 폭로를 응원하고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기 위해 일반 관객들이 기획해 연 첫 집회다.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6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해 공연계를 향해 한목소리를 냈다.

◆“공연계 문화 쇄신 계기 되길”

참가자들은 ‘공연계 me too 관객이 응원합니다. with you’라고 적은 피켓을 들었다. “피해자는 보호하고 가해자는 처벌하라. 공연계는 각성하라” “성범죄자 기용하는 제작사는 필요 없다. 성범죄자 재활용은 관객이 거부한다” 등의 구호도 외쳤다. 김가은 씨(호서대 공연미디어학부 2년)는 “공연계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이 연극계 원로”라며 “수많은 청년을 선생 자격으로 만나 영향을 미치다 보니 잘못된 문화가 구조로 굳어졌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공연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 투’가 본격 시작된 이후 지난 3주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위드 유’라는 문구를 단 글이 잇따랐다. 용감하게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나선 피해자들에게 ‘당신과 함께한다’는 연대감을 표시하는 문구다. 권위주의적인 문화 구조에 이제까지 적극 항거하지 않은 태도를 반성하고 이를 바꾸는 데 동참하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수준을 넘어 권위주의 문화 자체를 쇄신해야 근본적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공감이기도 하다.

참가자들은 “관객으로서 성범죄자가 참여한 작품을 소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성폭력 가해자인 문화예술인들이 시효 소멸 등으로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소비자의 선택으로 자연도태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주목된다. 연극인들도 “앞으로는 서로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연극인이나 단체는 지탄하며 이들과는 함께 작업하지 않기로 했다”는 의견을 나누고 있다.

◆영화성평등센터 등에도 기대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 23일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달라진 우리는 당신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강간문화의 시대는 끝났다’를 주제로 연 자유발언대회에도 100여 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이 참가했다. 여성민우회 측은 “최근 ‘미 투’ 운동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증언들은 단지 고백과 호소가 아니라 잘못된 관습과 맞서 싸울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라며 “이제 사회는 어떻게 성폭력과 성차별을 중단할 것인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성찰과 노력을 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고 했다.

영화계는 성폭력 문제 등을 개선하기 위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다음달 1일 개설한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임순례 감독이 공동 대표다. 임 감독은 “최근 번지는 ‘미 투’ 운동은 어느 분야에나 형성돼 있는 갑을 관계 때문에 그간 은폐돼온 것이 드러나는 현상”이라며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성숙하고 투명해지는 데 큰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

한편 정치권 주변에서는 이 같은 ‘위드 유’ 분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듯한 논쟁이 벌어져 눈총을 받았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지난 23일 온라인 팟캐스트에서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라고 볼 수 있다”며 “올림픽이 끝나면 그 관점으로 가는 사람들이나 기사들이 몰려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4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에서 “피해자 인권 문제는 진보·보수가 관련 없는 문제”라며 “진보 인사는 성폭력 범죄를 저질러도 방어하거나 감춰줘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