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왼쪽)이 23일(현지시간) 베를린 대통령궁에서 마르틴 슐츠 사회민주당 대표와 연립정부 구성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베를린AP연합뉴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왼쪽)이 23일(현지시간) 베를린 대통령궁에서 마르틴 슐츠 사회민주당 대표와 연립정부 구성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베를린AP연합뉴스
집권 기독민주·기독사회연합과 자유민주당, 녹색당 간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결렬되며 혼돈에 빠졌던 독일 정국이 사회민주당과의 대연정 협상으로 다시 가닥이 잡히고 있다.

사민당 지도부는 23일 밤(현지시간) 논의를 거듭한 끝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제1당 기민·기사연합과의 연정 협상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허버투스 하일 사민당 사무총장은 24일 “사민당은 대연정 회담이 열려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는다”며 “대화의 문을 닫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킹메이커’로 돌아온 마르틴 슐츠

독일, 돌고돌아 대연정?… 코너 몰렸던 메르켈 '기사회생'하나
사민당의 입장 선회는 마르틴 슐츠 대표의 당내 입지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결정이다. 사민당은 메르켈 1기와 3기 내각에서 대연정에 참여했지만 지난 9월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득표율(20.5%)을 기록했다. 중도좌파 정당으로서 차별화에 실패한 결과다.

슐츠 대표는 선거 패배 이후 제1 야당의 길을 선언하며 연정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그는 지난 19일에도 기민·기사연합과 자민당, 녹색당 간 자메이카(각 당의 상징색이 자메이카 국기 색과 같아서 나온 말) 연정 협상 결렬 이후 새로 연정 협상에 참여하지 않고 재선거를 받아들이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벼랑 끝에 몰린 메르켈 총리가 재선거를 받아들일 수 있다며 배수진을 치면서 사민당에 공을 넘기자 슐츠 대표는 당 안팎의 압박에 직면했다. 사민당 내에서 재선거 불가론과 연정 협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슐츠 대표가 메르켈 총리와 대화에 나서기로 한 데는 사민당 출신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의 면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23일 면담에서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사민당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며 메르켈 총리의 ‘킹메이커’로 나설 것을 요청한 것으로 관측된다.

◆극우 우려가 사민당 유턴 이끌어

사민당의 ‘유턴’은 힘을 키우고 있는 극우세력에 대한 불안이 작용한 측면이 크다. 재선거할 때 협상력을 보이지 못한 메르켈 총리에게 실망한 표가 독일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나 친기업 성향의 자민당으로 대거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민당도 의원 수가 감소할 것이란 계산이 고려됐다.

소수정부 구성 시에는 유럽 통합이나 중도좌파적 정책 추진이 교착상태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 자메이카 연정이 실패한 것도 난민 문제와 세금, 환경정책 등을 놓고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탓이다. 독일 정치 사상 소수정부가 유례가 없는 만큼 정부 정책 추진 때 건건이 발목이 잡힐 것이란 지적이다.

전날 8시간 동안 이어진 사민당 내 릴레이 논의에서도 이 같은 우려가 드러났다. “정부 안에서 중도좌파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책임 있는 태도”라는 연정 협상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슐츠 대표의 라이벌인 올라프 숄츠 함부르크 시장은 “유럽은 안정적인 독일 정부를 필요로 한다”며 사민당 내 강경파가 주장하는 소수정부론을 반대했다. 지난달 니더작센주(州)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차기 주자로 떠오른 슈테판 베일 니더작센주 총리도 소수정부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메르켈 리더십 회복할까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과의 대화 재개로 일단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당내 리더십은 상당히 위축됐다. 총선 책임론 등으로 기사당 내 권력투쟁이 거세지면서 메르켈의 우군인 호르스트 제호퍼 대표의 사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기민당 소장파 일부는 메르켈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고 있다. 기민당 내 보수진영 ‘가치연합’을 이끄는 알렉산더 미치는 “포스트 메르켈 시대가 시작됐다”며 반(反)메르켈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2015~2016년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후광’을 잃기 시작했다.

서방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로 여겨진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 위기가 유럽의 극우, 민족주의 바람을 촉발시킬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제안한 유럽 통합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개혁도 힘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주도하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 역시 영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