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4연임 사실상 확정…정치스승 콜 넘어 '청출어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CDU)-기독사회(CSU)연합이 24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이날 오후 6시 투표 종료 후 발표된 공영방송 ARD 출구조사 결과에서 기민-기사 연합은 32.5%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민주당 20%,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13.5%, 자유민주당(FDP) 10.5%, 녹색당 9.5%, 좌파당 9%를 기록했다. 2기 내각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을 비롯해 녹색당과의 연정이 필요하지만 4연임이 확실해진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16년간 최장수 총리를 지낸 헬무트 콜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메르켈 총리의 장기 집권 비결은 ‘중도 껴안기’ 전략으로 요약된다. 의무복무제, 원전, 동성혼, 난민법 등 쟁점마다 여론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기존 입장을 과감히 뒤집었다.

◆정책 뒤집기 전략

그는 트윗도 안 하고 대단한 공약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평범한 모습 때문에 독일 국민에겐 ‘무티(독일어로 엄마란 의미)’로 불린다. 유로존 위기가 화두이던 2013년 총선에선 “무티 리더십이 경제 위기를 이겼다”는 평가가 나왔다. 유로존 위기 동안 물리학자 출신답게 정책 입안 때 체계적, 분석적, 단계적인 스타일을 고수해 ‘안정된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부각됐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메르켈 총리는 ‘완벽하게 생각을 바꾸는 사람(flip-flopper)’이란 새 별명을 얻었다. 경쟁 후보인 마르틴 슐츠 사민당 대표가 ‘동성혼’ 입법을 공약으로 삼자 바로 다음날 “동성혼 표결은 양심의 문제로 다루겠다”며 여당의 동성혼 금지 입장을 단숨에 철회해서다. 의회 표결에서 자유투표를 허용하며 좌파 지지층을 흡수하는 동시에 본인은 반대표를 던져 보수적 신념을 유지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메르켈 총리의 정책 뒤집기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는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메르켈 총리는 2011년 쓰나미로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붕괴되자 며칠 만에 원전 철수 반대에서 탈핵 추진으로 선회했다. 강경한 난민정책으로 ‘얼음 여왕’으로 불린 메르켈 총리는 201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역에 몰려든 수천 명 중동 난민의 독일 이민을 전격 수용했다.

◆좌파 이슈도 먹어치워

메르켈 총리는 집권 12년 동안 좌우를 넘나들며 연정 파트너의 정책을 적극 수용하면서 정치 영토를 넓혀왔다.

그는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 탬플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물리학자로 일하던 메르켈은 동독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주개혁(이후 기민당에 통합)에 가입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과도기 동독 정부는 메르켈을 부대변인으로 임명했고, 통일 이후 콜 당시 총리는 그를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임명했다.

메르켈 총리는 보수적인 신념이 강한 정치인이지만 2005년 총선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사민당 후보에게 근소한 격차로 승리하자 사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정치적 스승인 콜 전 총리의 낙선을 목격하면서 중도좌파 끌어안기를 선택했다.

메르켈 총리는 두 번째 임기에선 친(親)기업 보수정당인 자민당과 연정하면서 보수색을 강화했다. 2013년 출범한 3기 내각에선 다시 사민당과의 대연정으로 부모수당제 도입, 최저임금 상향 등 진보적 의제가 힘을 받았다. 2015년에는 100대 기업의 경영진에서 여성 비율을 30%까지 의무화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의 중도 껴안기 행보는 되레 중도층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 메르켈 총리의 난민 정책으로 AfD가 세력을 키워 의회에 입성하게 됐다. 사민당에 실망한 좌파 지지층 일부도 좌파당 등 극좌정당으로의 이탈을 가속화했다.

◆국제사회 안정화에 역할 기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은 서방사회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메르켈 총리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국제사회 안정성을 위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배경이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연합(EU) 방위동맹을 지지하지만 경제적 통합에는 반대하고 있다. EU 통합에 목소리를 내는 마크롱 대통령과 비교해 EU 내에서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할지는 미지수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