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첫 미국 국비유학생
“화산·지진·간헐천 등에 관한 지구과학 시험에서 94점, 수학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 매우 기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 유길준이 미국에서 1884년 11월3일 쓴 편지다. “어제 시험을 보았는데 87점을 맞았다. 다른 학생보다 16점 더 높지만 만점인 100점보다 13점 낮은 점수다”는 내용의 편지도 있다.

28세에 고교 3학년으로 편입해 10대 학생들과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그의 성적은 우수했다. 한 해 전 사절단으로 파견됐다가 국비유학 기회를 얻었으니 촌음도 아껴야 했다. 버스와 기차를 처음 보고 기계와 에너지의 원리를 이해한 그는 한복을 벗어던지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상투도 잘랐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터지자 고종의 친서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대서양 건너 유럽 각국을 견학하고 중동, 동남아, 일본을 거쳐 제물포항에 닿은 것은 1885년 말.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난 일 때문에 개화당으로 몰려 체포된 그는 구금 생활 중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이를 통해 서양 근대문명을 소개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창하며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다.

이 책엔 도서관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서구에서는 큰 도시마다 도서관이 없는 곳이 없고, 누구든지 도서를 열람할 수 있다”며 “유명 도서관으로는 영국 런던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프랑스 파리에 있는 것들인데 파리 국립도서관은 소장 도서가 200만 권에 달해 프랑스 사람들은 항상 긍지를 갖고 있다”고 적었다.

그의 개화사상은 어릴 때 박규수 서재에서 지구본을 보고 세계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싹텄다. 수에즈 운하까지 확인한 그로서는 시대에 뒤처진 조국이 안타까웠다.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하루빨리 알려야 했다. 그는 책 1000부를 찍어 지식인들에게 나눠줬다. 하지만 돌아온 건 탄핵과 상소였다. 해괴한 사상으로 혹세무민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엔 금서로 묶였다.

이후 일제의 유학생 규제로 미국 국비유학은 한동안 끊어졌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재개됐다가 전쟁통에 흐지부지됐다. 1958년부터 다시 선발했지만 4·19로 또 중단됐다. 국비유학생 제도가 제대로 살아난 것은 1977년이었다. 1980년대 유학자유화 이후로는 국비장학생보다 개별 유학생이 많아졌다.

신라의 도당(渡唐) 유학부터 따지면 1400년에 이르는 국비유학의 역사이지만 미국행은 채 140년이 안 된다. 그나마 제2, 제3의 유길준이 신학문을 배우고 자유와 실용의 가치를 키운 덕분에 국가발전을 앞당길 수 있었다. 오늘은 정부수립 후 첫 미국 국비유학생들이 떠난 날, 모레는 유길준이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한 날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