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21세기 부의 원천, 가상화폐
PC화면이 갑자기 바뀌더니 ‘파일이 암호화됐다’는 안내문이 떴다. 랜섬웨어에 감염된 것이다. 잠시 황당했지만 다행히 주요 파일을 백업해 뒀음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안내문에 따라 해킹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일정액의 비트코인을 내면 암호를 풀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랜섬웨어와 가상화폐를 현실에서 접하는 경험으로, 범죄자들이 가상화폐를 실물자산으로 바꿀 수 있으니 가능한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협박이 고조되자 글로벌 금융시장도 영향을 받았다. 통상 국제정세의 위험성이 커지면 미국 달러화 가치가 상승했지만 이번에는 가상화폐 가격이 급등했다. 연초 1000달러로 시작한 비트코인은 4000달러를 돌파했고, 이더리움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사이버 네트워크에 기록된 데이터에 불과한, 신기루로 여겨졌던 가상화폐가 전통적 안전자산인 달러보다 시장에서 선호되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20세기 후반 정보혁명의 산물인 가상화폐는 개념적 차원이 아니라 기존 화폐의 보완 수단으로 실생활에 연결되는 단계에 진입했다. 아마존, 페이팔, 라쿠텐 등 글로벌 온라인 사업자들이 가상화폐 결제를 도입한 가운데 독일과 일본 정부는 결제 수단으로 공식 인정했다. 더 나아가 스웨덴과 아이슬란드는 정부 차원에서 자체적 가상화폐 발행을 검토하면서 법정통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결제 수단으로서 가상화폐의 장점은 인정하면서도 해킹 위험성, 높은 변동성 등 사유로 법정화폐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화폐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런 단점은 모두 거쳐온 과정이다. 금속화폐 단계에서 국가권력이 금, 은, 동으로 주조한 법정주화도 위조주화 출현과 귀금속 함량 변경에 따른 가치변동성에 항시 노출돼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가치를 금과 연동시킨 금태환 포기를 선언한 이후 현존하는 모든 법정화폐는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이 인쇄한 종이에 불과하다. 이후 실질가치가 없는 지폐 가치가 화폐 발행량, 국가별 인플레이션,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급변동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더 나아가 오늘날 화폐는 실물 소유가 아니라 대부분 금융기관 서버에 보관돼 금융기관이 보증하는 일종의 데이터다. 따라서 전쟁 등 극단적 상황으로 국가 소멸, 금융기관 파산이 발생하면 가치 보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특정 국가의 법정화폐보다 오히려 글로벌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가상화폐가 더욱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21세기에도 특정한 국가와 은행의 소멸은 충분히 발생 가능하지만 글로벌 사이버 네트워크 전체의 소멸은 인류 문명 자체의 종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상화폐 출현으로 부의 원천이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부의 원천이 근대 이전의 무력을 통한 정복, 주요 자원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라는 물리적 힘에서 출발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토지·노동·자본의 결합을 통한 실물생산 능력으로 발전하고 20세기 후반 정보혁명을 통해 총체적 정보기술(IT) 역량으로 이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들은 컴퓨터를 활용해 특정의 암호체계를 풀어서 채굴하는 방식으로, 집단이 활용할 수 있는 IT 역량이 많을수록 많은 가상화폐를 확보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가상화폐 채굴에 필요한 컴퓨터 그래픽 카드의 가격이 전 세계적으로 급등하는 배경이다. 이는 과거 부의 원천이 인구, 영토, 군사력이었다면 미래 정보화 사회에는 가상화폐 모델 디자인 및 채굴 가능한 IT 역량으로 이전되고 있음을 웅변한다.

앞으로 글로벌 차원에서 가상화폐의 부상에 반비례해 기존 법정화폐의 약화는 불가피하다. 국가기관에서 통화를 발행해 유통시키고 환전을 통제해 발생하는 권위와 신뢰성은 글로벌 차원에서 민간이 자율적으로 발행해 통용시키는 가상화폐의 거센 도전을 받을 것이다. 유럽 일부 국가에서 추진하는 법정 가상화폐도 궁극적으로는 단일 국가 단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속성으로 인해 글로벌 단위의 민간 가상화폐의 성장을 막지 못하는 상황이다. 가상화폐의 등장과 확산은 단순히 새로운 결제수단 출현의 차원이 아니라 21세기 부의 원천이 이동하면서 생겨나는 근본적 질서 변화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대의 선도자가 될 수 있다.

김경준 < 딜로이트 안진경영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