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용비어천가’. 국립극단 제공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용비어천가’. 국립극단 제공
객석 조명이 꺼지면 무대 위 화면에 작가 영진 리가 연거푸 따귀를 맞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진 리는 반복되는 손찌검에 눈물을 흘리고 코를 훌쩍이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돌려 카메라 렌즈를, 그 너머의 관객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시선은 집요하다. 관객들은 마치 폭력의 공모자가 된 것 같은 죄책감에 휩싸인다.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용비어천가’는 관객을 찔리게, 또 질리게 하는 그 시선에서 출발한다.

국립극단이 한국인의 정체성 탐구를 목표로 다음달 23일까지 선보이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이 지난 1일 한국계 미국인 극작가 영진 리의 ‘용비어천가’로 막을 올렸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을 지칭하던 ‘디아스포라’는 고국을 떠나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 전반을 가리킨다.

국립극단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극작가 영진 리, 인숙 차펠, 줄리아 조, 미아 정, 인스 최 등 5인의 작품을 한국 무대에 올리는 이번 기획에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차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

미국에서 ‘가장 모험적인 극작가’라는 평을 받은 영진 리의 ‘용비어천가’는 한국계 미국인과 한국인들, 백인인 남녀 커플의 얘기다. 한국계 미국인(재미동포)과 한국인들은 서로에게 가학행위를 하며 스스로에 대한 지독한 인종차별적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영진 리는 한국인인 동시에 미국인인 자신이 ‘소수민족’으로서 백인들에게 당하는 차별을 관객에게 호소하고 백인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한다. 동시에 “전 백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고백한다. 자신이 경멸하는 상대를 조롱하는 동시에 상대에게 조롱을 퍼붓는 자신을 또한 조롱한다. 대사 중 한 대목은 영진 리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이건 인종차별에 대한 아주 세련된 비판이에요. 하지만 진실은 당신이 소수민족이면서도 한 술 더 뜨는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 스스로를 욕하는 입장에 서면 백인들이 ‘오, 넌 정말 쿨한 소수민족이야’라면서 자기들 그룹의 일원으로 대우해준다는 거예요. (…) 제 정신상태는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그리고 동성애자인 백인 남성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똑같아요.”

차별과 풍자의 대가로 꼽히는 오동식 연출가는 이런 긴장 속에서 폭소와 냉소, 비소를 터뜨리게 하는 연출의 미학을 선보인다. 갖은 차별의 언어와 혼돈이 일으키는 불편함 속에서 ‘나 역시 삶의 어느 순간 차별의 공모자였을 수 있다’는 찔림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관람 경험을 선사한다.

◆위태로운 사랑 속 디아스포라

두 살 때 영국으로 입양된 인숙 차펠의 데뷔작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는 위태로운 사랑 얘기다. 극에서 부모를 여읜 뒤 영국 가정에 입양된 누나 미소와 한국에 남겨진 남동생 한솜은 25년 만에 재회한다. 그들 인생에 깊이 새겨진 공허함과 상실감은 오직 서로에게서 나왔기에 둘밖에는 이를 채워줄 사람이 없다. 그 ‘대체 불가능성’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고 만다. 두 사람이 하필 피를 나눈 남매 관계라는 데서 이 사랑은 치명적이고 비극적이다.

연출을 맡은 부새롬은 “인물에게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있어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것 또한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한다”고 해석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작가 줄리아 조의 작품 ‘가지’는 재미동포 2세이자 요리사인 ‘레이’와 그의 아버지 얘기다. 레이가 문화적 차이와 언어 장벽, 성격 차이 등으로 멀어졌던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그와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애잔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두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극작가 미아 정의 ‘널 위한 날 위한 너’는 북한에서 탈출한 자매 얘기를 북한과 뉴욕을 오가며 펼친다.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무는 과감한 연출가 박해성이 상상의 세계를 무대 위로 불러낸다.

인스 최의 ‘김씨네 편의점’은 지난해 캐나다 CBC TV 시리즈에 방영되고 올해 캐나디안 스크린 어워드 11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캐나다에서 먼저 눈길을 끈 작품이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