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 있는 최고경영자(CEO)들이 합병 등 안건에 대해 ISS를 설득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찾아간다. 기관투자가들이 스스로 의안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ISS의 자문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로 알려진 레오 스트라인 미국 델라웨어주 대법원장이 2005년 워싱턴법률재단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의결권 자문사가 스스로 권력기관화하면서 상장사의 로비 대상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힘 커지는 '의결권 자문사'] 상장사 주주총회 '최고권력'으로 떠오르는 의결권 자문사
한국의 자문시장 실태는

요즘 한국 상장사들이 이와 똑같은 우려를 내놓고 있다. 금융당국이 기관투자가를 상대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강조하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반기업 정서가 난무하고 의결권 자문시장 자체가 성숙되지 않은 여건에선 부작용이 더 클지 모른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결권 자문사는 한국거래소 산하 한국기업지배구조원과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 4곳이다. 세계 의결권 자문시장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1위 자문사인 미국의 ISS도 한국 상장사에 대해 연간 100건가량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국내 의결권 자문시장의 전체 규모가 연간 10억원을 약간 웃도는 정도여서 회사로서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인력 구성은 경영·경제학 박사나 애널리스트 회계사 변호사 교수 등으로 구색을 갖추고 있지만 4개사 모두 20여명 안팎에 그친다.

이들의 임무는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의 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사 후보자에 대해선 범죄 경력, 독립성이나 전문성 여부 등으로 찬반을 결정한다. 기본 업무는 고객사가 요청하는 보고서 작성이지만 그 밖에 주요 상장사에 대한 요약보고서도 만든다. 합병·사외이사나 감사위원 선임·정관변경·재무제표 승인 등 주주총회에 올라오는 모든 안건이 분석 대상이다. 분석을 위해 탐방을 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 등의 투자회사가 계속 늘어나면서 이들이 처리해야 할 의안도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일감이 늘어나면 사람을 더 뽑아야 할 상황이지만 아직 국내에 관련 전문가 집단도 구축돼 있지 않다. 의결권 자문사 결정에 목을 매야 하는 상장사들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최문희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짧은 정기 주주총회 기간에 압축적으로 검토해야 할 안건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고 심도 있는 분석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1위 ISS도 실수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분석인력(500여명)을 보유하고 있는 ISS도 실수할 때가 없지 않다. 2013년 KB금융지주의 사외이사 선임에 대한 반대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ISS는 안건분석 보고서를 통해 3명의 사외이사 중 일부에 대해 반대를 권고했다. 문제의 이사들이 KB금융지주의 ING생명 인수에 반대표를 던지는 바람에 지주사 운영에 혼란을 줬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ISS 보고서와 달리 그들은 ING생명 인수에 찬성한 인사였다. KB금융지주의 전 임원이 제공한 잘못된 정보를 ISS가 검증 없이 분석보고서에 실은 게 발단이었다.

오판은 누가 책임지나

그럼에도 자문사의 권고는 실제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나디아 말렌코 미국 보스턴대 금융학과 교수가 2015년 5월 발표한 논문 ‘의결권 자문사의 역할’에 따르면 임원 보수 관련 주총 표결에서 ISS의 반대 권고는 찬성표를 25%포인트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지배구조 자문사인 HQB파트너스의 연구에서도 ISS가 2010~2011년 반대 의견을 낸 주주총회 안건에 70% 이상 기관투자가들이 그대로 따른 것으로 파악됐다.

2015년 1~3월 정기 주총에서 국내 61개 자산운용사가 행사한 의결권 내역도 비슷한 흐름이다. 외부자문을 받은 9개 운용사의 반대비율은 28.6%로 그렇지 않은 운용사(3.1%)에 비해 9배가량 높았다.

한 연기금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삼성물산 합병 때 국민연금이 자체 판단으로 자문사 권고와 반대되는 표결을 했다가 온갖 비난에 검찰 수사까지 받고 있지 않느냐”며 “이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사안은 자문사의 결정을 그대로 따라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결국 의결권 자문사의 입김이 세질수록 기관투자가의 역할은 위축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기관이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모럴해저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