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진(嗔): 정직과 배려
지난 10일 대통령 탄핵이 결정된 날은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는 삼우제를 치른 날이기도 했다. 행사를 마치고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어머니 집을 방문했다. 둘째 여동생이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아버지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너무 좋은 선물을 주고 가셨네. 대통령이 파면됐네”라고 말한 순간 첫째 여동생의 딸인 조카가 “이모! 할아버지가 나에겐 선물이 아니라 저주를 주고 가셨다는 건가요?” 하며 맞받아쳤다. 마침 그때 초인종이 울리며 배달 주문한 치킨이 도착하면서 논쟁은 마무리됐지만 한국의 현실은 이처럼 식구끼리도 진영논리로 편이 갈린 상황이다.

나는 여기서 嗔(성낼 진)이란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20여년 전 윤리사상사 강의를 준비하던 때였다. 나의 입은 항상 진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불교의 삼독(三毒)인 탐(貪), 진(嗔), 치(癡) 중 하나였던 진을 처음 본 순간 충격에 휩싸였다. 진(嗔)은 口(입 구)+眞(참 진)이 결합한 것인데도 남을 화나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입은 자기 생각대로 진실하게 말하는데 도리어 남을 화나게 하고 사람을 망치는 삼독이 되다니. 놀라운 한자의 조어 아닌가. 그렇다. 세상사가 각자의 진실, 각 진영의 논리만 얘기하면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2007년 메가스터디그룹 기업이미지통합(CI)을 위해 새로운 슬로건을 만들면서 3대 핵심가치(정직과 배려, 도전과 혁신, 최고지향)를 정했다. 이 중에서 특히 ‘정직과 배려’는 진(嗔)이란 글자의 의미를 되새기며 정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청교도 집안에서 자라 정직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고, 지금까지도 정직을 삶과 비즈니스의 중심 가치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정직’에는 뭔가 부족한 게 있다는 느낌이었고 여기에 무엇이 더해져야 완전한 의미를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

그러던 중 이 진(嗔)이란 글자가 지닌 의미를 참고해 정직에 배려를 결합시켰다. 구성원 각자의 진실과 정직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깃든다면 완전체로서의 공동체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정직에 기초해서 신뢰를 드높이고, 더 나아가 이웃과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배려가 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손주은 < 메가스터디그룹 회장 son@megastudy.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