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경제민주화 입법, '경제 초토화법' 될 수도
경제민주화 유령이 또다시 배회하고 있다. 표(票) 냄새를 맡아서일 것이다. 시간이 가면 정책 아젠다도 바뀌기 마련이지만 경제민주화는 ‘불사조’다. 경제민주화가 ‘양극화 프레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양극화 프레임 아래에서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돕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정언적 명분을 갖는다. 양극화를 강고하게 붙들지 않으면 경제민주화는 와해된다. 양극화와 경제민주화는 숙명처럼 ‘먹임과 되먹임’을 통해 스스로를 강화시켜왔다.

양극화는 분노를 추동하는 정치용어다. 사회가 중간계층 없이 빈자와 부자로 나뉠 수는 없다. 양극화 대신 중립적인 ‘소득격차 확대’로 기술해야 한다. 경제구조가 고도화해 이익이 분화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질수록, 고학력 사회로 갈수록 소득 차이는 커질 수밖에 없다. 농경사회의 천석꾼은 오늘의 부호에 비할 바 아니다. 이유가 있는 소득격차를 양극화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

국내총생산은 새로 창출돼 더해진 부가가치의 합으로 ‘고정된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크기는 ‘독립적’으로 결정된다. 김서방이 돈을 벌었기 때문에 박서방이 돈을 벌지 못한 것이 아니다. 경제민주화 정책 사고의 치명적 오류는 경제를 이분법의 시각으로 본 것이다. “누군가 부당하게 많이 가져갔기 때문에 내 몫이 작아졌다”고 믿게끔 한 것이다.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경제민주화는 태생적으로 ‘인기영합’에 흐를 수밖에 없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무려 20개나 된다. 전통시장과 소상공인 등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19대 국회와 판박이다. 하지만 더 ‘좌클릭’했다. 심지어 면세점과 복합쇼핑몰까지 의무휴일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들은 골목상권과 전혀 관계가 없다.

김종인 의원이 대표발의한 상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집중투표제, 대주주 의결권 제한 및 감사 분리 선임, 우리사주 사외이사 추천제’의 명분은 경제적 약자인 소액주주와 노동자에게 힘을 실어줘 지배주주와 경영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액주주가 경제약자일 수는 없다. 특정 주주의 의결권 우대는 ‘주주평등 원칙’과 배치된다. 글로벌 대기업의 소액주주는 내국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감사 분리 선임과 집중투표제가 결합되면 헤지펀드들은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감사로 밀어넣을 수 있다. 다중대표소송제도 역시 이례적이다. 다중대표소송제를 의무화하고 있는 일본은 경영권 침해와 자회사 주주의 권리 침해 등을 이유로 다중대표소송 대상을 ‘100% 자회사’로 한정하고 있다. 다중대표소송제는 국내 기업의 자회사, 손자회사의 빗장을 풀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동이사제 도입은 ‘노조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할 소지가 있다. ‘무기대등의 원칙’은 노사관계뿐만 아니라 경영권 방어 시장에도 적용돼야 한다.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를 위한 방패가 불비(不備)한 상태에서 자사주 의결권마저 인정하지 않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는 사실상 무장해제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기업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식물이 아니다.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지주회사인 엑소르는 2014년 등기상 주소를 네덜란드로, 세법상 주소를 영국으로 이전했다. 네덜란드가 경영권 방어에 유리했고 영국의 법인세(21%)가 이탈리아(27%)보다 낮아서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한다”는 식의 과장된 현실 인식은 입법 오류를 낳는다. 경제민주화를 표방한 각종 기업 옥죄기 법안은 해외 기업의 국내 진출은 고사하고 국내 기업의 해외 탈출을 부추길 수 있다. 골목상권 보호를 명분으로 유통 혁신을 막는 것만큼 교각살우는 없다.

양극화를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모두 가난해지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법안은 사전적 의도와 관계없이 경제를 압살해 일자리를 파괴하는 ‘경제 초토화’ 법안이 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정책은 신앙이 아니라 과학에 기초해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어떤가.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