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논란이 끊이지 않던 사용후핵연료(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 문제에 대해 정부가 체계적인 로드맵을 제시한 것은 작년 5월이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과거 정부가 일방적으로 부지를 지정해 지역 주민의 반발을 샀던 것에서 벗어나 지방자치단체 및 국민과의 소통 절차를 거쳐 2028년까지 부지를 선정하고 2053년께 본격 가동한다는 중장기 그림을 내놓았다.

산업부는 이런 로드맵을 추진하기 위해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부지선정위원회’를 세우기로 했고, 근거가 될 법안(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 부지선정 절차 및 유치지역 지원법안)을 작년 11월 초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는 석 달째 감감무소식이다.

전문가들은 “올해부터 부지 선정 작업을 시작한다 해도 지역 주민의 동의를 얻어야 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며 “국회의원들의 직무유기로 첫 단추부터 끼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탄핵 정국에 막힌 방폐장 부지 선정] 월성원전 폐기물 2년 후면 꽉 차는데…방폐장법 손 놓은 국회
원전 지역 의원들조차 무관심

당초 산업부는 고준위 방폐장 건설계획을 세우면서 지난해 말 법안을 통과시키고 올해부터 부지 선정 작업에 착수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국회에 제출된 법안을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가 50일이나 지난 12월22일 상정하며 연말 처리는 무산됐다. 법안 상정일에 4명의 야당 의원이 주형환 산업부 장관에게 관련 질문을 한 게 국회에서 이뤄진 해당 법안에 대한 논의 전부다.

올해 1월 임시국회가 열렸음에도 산업위는 단 한 번의 법안심사소위원회도 소집하지 않았다. 산업위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법안심사소위에서 이를 심의해 전체회의로 넘겨야 한다. 국회 산업위 관계자는 “정부가 지난해 고준위 방폐장 건설 로드맵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원전이 모여있는 부산 울산 지역 의원들의 관심이 많았다”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탄핵정국에 들어서자 해당 법안이 의원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고 전했다.

정부는 2월 임시국회를 법안 처리의 데드라인으로 잡았다. 본격적인 조기 대통령 선거 체제로 들어가면 법안 처리가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서다. 정부 관계자는 “빠듯한 감은 있으나 2월에 법안이 통과되면 올해부터 부지 선정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며 “반면 민감한 법안은 차기 정부에서 처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연내 통과도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법안 처리가 다음 정부로 넘어가면 현 정부가 정한 로드맵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방폐장 부지 선정 과정의 잡음을 피하기 위해 차기 정부가 무기한 연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 우려다. 이 경우 방폐장 부지 선정까지 정부가 잡은 10여년이란 기간이 훨씬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고준위 방폐물에 비해 방사선량이 50억분의 1에 불과한 중·저준위 방폐물 처분장 부지 선정도 지역 갈등과 보상 문제 등으로 20년 가까이 걸렸다.
[탄핵 정국에 막힌 방폐장 부지 선정] 월성원전 폐기물 2년 후면 꽉 차는데…방폐장법 손 놓은 국회
방폐물 포화상태 다가오는데…

현재 각 원전에 보관 중인 고준위 방폐물은 약 1만4000t에 달한다. 각 원전 저장용량의 평균 70% 이상이다. 2019년 월성원전을 시작으로 2024년 한빛·고리원전, 2037년 한울원전, 2038년 신월성원전이 차례로 포화상태에 이른다.

정부는 각 원전에 임시저장시설을 확충해 급한 불을 끈 뒤 2035년 완공하는 중간저장시설에 폐연료봉 등을 옮긴다는 계획이다. 방폐장 건설이 지연될수록 임시저장시설 용량도 늘어난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특정한 것도 아니고 절차만 정하자는 건데 국회가 법안을 잡고 있으면 미래세대의 부담만 늘어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방폐장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면 모를까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미룰수록 손해”라며 “2월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조속히 법안을 처리하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원전 인근 주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준위 방폐물이 원전에서 반출되기를 희망하고 있다”며 “원전이 있는 지역구 의원으로서도 고준위 방폐장법이 통과되는 게 민심을 추스르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나온 폐연료봉 등을 말한다. ‘사용후핵연료’라고도 하며 30만년이 지나야 천연 우라늄 수준으로 방사능이 줄어든다. 원전과 병원 등에서 사용한 작업복, 장갑, 부품 등 방사능이 상대적으로 적은 중·저준위 폐기물과 구분된다.

이태훈/오형주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