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서스는 요즘 같으면 ‘강남좌파’로 불렸을 것이다. 《인구론》(1798)으로 세상에 저주를 퍼붓고는 38세에 뒤늦게 결혼해 자녀 셋을 뒀다. 말 따로 행동 따로다. 그래선지 1960년대 출간된 《인구론》의 저자 소개에는 그의 자식 수가 무려 11명으로 기재되기도 했다. 그만큼 미웠던 모양이다.

인구론은 100년도 안 돼 오류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후예(신맬서스주의자)들은 19세기 말 산아제한을 제도화시켰고 1970년대에는 인구폭탄과 자원고갈론으로 세계를 풍미했다. 폴 에를리히의 《인구폭탄》(1968),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1972)가 그것이다. 이 역시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허무한 종말론으로 판명됐다. 그럼에도 ‘설국열차’ ‘킹스맨’ ‘인페르노’ 등처럼 맬서스의 망령은 여전하다.

인구가 모든 걸 결정하진 못해

지구 차원에선 인구 증가가 여전히 숙제다. 세계 인구는 4.5일마다 100만명씩 늘고 있다. 미국 통계국 인구시계는 73억6400만명을 가리킨다. 2050년께 100억명이 된다. 하지만 인구 압력은 저개발국에 국한된 대신 인구의 부익부 빈익빈이 문제로 떠올랐다.

한국을 포함해 대다수 발전된 나라는 인구절벽과 고령화에 직면해 있다. 한국은 올해부터 생산인구(15~64세)가 감소하는 소위 인구절벽에 접어들었다. 저출산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불안심리 탓에 서점가에는 해리 덴트의 《인구절벽》류의 예언서들이 홍수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전 분야가 충격을 받으니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들과 결별하라’고 요구한다. 미래가 희망은커녕 공포 그 자체인 듯하다.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까. 인구 변화가 모든 것을 파탄으로 몰고 갈까. 물론 생산요소로서 인구는 중요한 변수다. 인구 증가를 전제로 한 생산과 소비, 연금, 부동산, 교육, 군대 등이 그 영향권이다. 하지만 인구 결정론은 맬서스의 인구론만큼이나 억측에 가깝다. 맬서스 이래 어떤 인구 예언도 들어맞은 적이 없다. 과거 경험과 현재의 지식으로 미래를 재단할 때 생기는 오류다. 맬서스는 녹색혁명이나 피임 세탁기 등의 발명은 상상도 못했다. 인간은 변화에 적응해가는 존재다.

인구 변화가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란 예측도 과장이다. 예컨대 몇 해 뒤 수험생과 대입 정원이 1 대 1이 된다고 재수생이 사라질까. 누구나 쉽게 가는 대학이라면 옥석 구분은 더 철저해질 것이다. 인구절벽의 충격적 예언대로라면 한국이나 선진국 집값은 진작에 떨어졌어야 맞다.

진짜 문제는 '창의력 질식'이다

인구절벽론은 인구의 양적 측면만 강조했지 질적 측면은 간과하고 있다. ‘생산능력=인구×생산성’ ‘소비능력=인구×소득’의 함수다. 생산인구 감소는 생산성 제고로 극복할 수 있다. 고령자 기준을 70세로만 높여도 확 달라진다. 노동비용이 비싸지면 1인당 소득도 오른다. 대신 기계화 자동화가 더 가속화할 것이다. 값싼 노동력의 문제가 남지만 고부가산업은 더 활성화될 수 있다. 산업혁명도 그렇게 일어났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적응력이다. 생산성이 낮고 독점적 지대가 존재하는 곳마다 강고한 기득권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개혁하되 나는 빼라’는 이익집단, 표라면 영혼도 팔 정치권, 절대 변치 않겠다는 노동귀족…. 안 틀리는 기술을 요하는 수능, 수요(사회·학생)보다 공급(교수) 위주인 대학교육에 창의성은 질식한다. 두려운 것은 인구절벽이 아니라 생산성도, 창의성도 다 틀어막힌 이 상황이다. ‘대한민국의 절벽’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