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 출간한 성석제 씨
“기상학자가 과거 지구 환경을 연구하기 위해 극지방에 가서 얼음 깊숙이 구멍을 뚫어보는 이유는 뭘까요. 지구 기상의 역사가 그곳에 응축돼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인간의 조건이 뭔지, 삶이 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응축돼 있어요. 소설을 통해 이들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게 제 목표입니다.”

소설가 성석제 씨(56·사진)가 12일 새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문학동네)를 펴냈다. 장편 《투명인간》 이후 2년 만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최근 3년여 동안 계간지 등에 발표한 단편 8개가 실렸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구절로,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라는 뜻이다.

책에 실린 작품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삶의 극한 상황을 체험해본 이들이다. 표제작 ‘?리도 괴리도 업시’는 조용히 살던 소설 속 화자 ‘나’ 앞에 동성애자가 된 옛 친구가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짐작했으면서도 막상 사실로 드러나자 깜짝 놀라는 ‘나’에게 그는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이성애자”라고 쏘아붙인다. 성씨는 “동성애자는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사람 양쪽에서 돌을 맞는 존재”라며 “소설집 전체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표제작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삶의 극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역사 속 사건을 끌어오기도 했다. ‘매달리다’는 ‘납북 어부 간첩사건’으로 불리는 실화를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조업 중 북방한계선을 넘어 원치 않게 북한에 갔다 온 어부가 간첩으로 몰려 삶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렸다. 성씨는 “예전에는 삶의 절단면이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걸 망설였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며 “목격하고 듣는 삶의 비극성이 전보다 강해지다 보니 나 스스로 여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수록작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으로는 마지막에 실린 ‘나는 너다’를 꼽았다. 스마트폰 중독자가 작품의 주인공이다. 성씨는 주인공이 처한 고단하고 팍팍한 삶의 모습을 여러 통계지표를 인용하며 보여준다. 칼럼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시사성이 강하다.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능청스러운 태도와 풍성한 해학’이라는 특유의 스타일을 상당 부분 살렸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글쓰기 철학이다. 그는 “문학은 서비스업”이라며 “독자가 제 소설을 읽고 즐거워하거나 공감하기를, 나아가 공명하기를, 궁극적으로는 같이 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