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의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부도위험이 치솟으면서 새로운 글로벌 금융위기의 뇌관이 될지 주목된다.

재정건전성 우려의 주요인인 미국이 부과할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주택담보대출유동화증권(RMBS)의 부실판매에 대한 벌금이 기존 140억달러(15조4천억원) 대신 54억 달러(5조9천억원)로 낮춰질 것이라는 보도에 사상 처음 10유로 아래로 내려갔던 주가가 급반등했지만, 당분간 불안은 계속될 전망이다.

도이체방크에 대한 공매도(숏셀링)가 유행처럼 번진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 은행에서 헤지펀드들이 돈을 빼기 시작한 것을 신호로 도이체방크가 제2의 리먼 브러더스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도이체방크는 덩치가 훨씬 크고 보유 현금도 넉넉한데다, 여차하면 유럽중앙은행(ECB)에서 거의 0%에 가까운 금리로 현금을 융통할 수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리먼 브러더스와는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어떤 금융기관도 현금이 무한정 충분한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주가가 계속 곤두박질칠 경우 유상증자를 하거나, 지분인수 등의 형태로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 재정건전성 우려에 치솟는 부도위험
2일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도이체방크의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지표인 5년물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234.5bp(1bp=0.01%포인트)로 전 세계 주요 은행 중 가장 높다.

도이체방크의 CDS프리미엄은 지난달 27일 252bp까지 뛰어 올해 1월 코코본드 이자 미지급 위기, 7월 국제통화기금(IMF)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금융기관으로 지목한 당시에 이어 2011년 유럽 재정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부도 위험이 두 번째로 높은 프랑스와 벨기에 합작은행인 덱시아은행(206.91bp)이나 3위 이탈리아 최대은행 우니크레디트(193.67bp), 4위인 이탈리아 2위 은행 인텐사 산파올로(150.96bp)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높다.

도이체방크의 부도위험이 다시 이같이 치솟게 된 것은 도이체방크의 자본부족과 재정건전성을 둘러싼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도이체방크가 과거 보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위험한 RMBS를 안전한 것처럼 속여 판매한 혐의로 미국 법무부로부터 벌금 140억 달러를 부과받을 것이라는 언론보도였다.

도이체방크는 2분기 현재 벌금 등을 위해 62억 달러를 적립해뒀지만, 늘어난 벌금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에 "정부에 지원요청을 했다", "정부가 구제금융을 위한 긴급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현지언론의 보도가 잇따랐다.

이에 글로벌 금융시장의 투기세력은 도이체방크의 주가가 더 내려갈 것이라는 데에 베팅을 늘리면서 주가가 사상 처음 장중 10유로 아래인 9.89유로까지 떨어졌다.

이는 올해 초 22유로 대비 45%, 글로벌 금융위기 전 기록했던 93유로의 10분의 1 수준이다.

주말인 지난달 30일에는 도이체방크의 벌금이 당초 언론보도보다 10조원 가량 감액된 54억 달러에 합의될 것이라는 전망에 이 은행 주식은 6.4% 뛴 11.67유로에 마감했다.

도이체방크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금이 간 유럽 금융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마르틴 헬미히 프랑크푸르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지난주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유럽의 은행부문이 여전히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이를 마이너스 금리와 규제강화, 미국의 벌금 등과 결합해보면 유럽 은행들은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도이체방크, 제2의 리먼 브러더스 되나


2008년 9월 15일 미국 뉴욕시간 기준 새벽 2시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 신청을 불러온 직접적인 요인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헤지펀드들이 돈을 대거 빼낸 데 있었다.

도이체방크에서도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주요 헤지펀드 10곳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파생상품 자산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리먼 브러더스와의 유사성이 부각됐다.

이들은 도이체방크에 파생상품 청산대행을 위해 돈을 맡긴 헤지펀드의 5%에 해당한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 당시 곤란에 처했던 경험이 있는 한 헤지펀드 매니저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모든 이들이 극도로 민감해하고 있다"면서 "리먼 때 모두들 위험 노출액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아무런 이점이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한 이유는 고객이나 거래상대방에 내줄 현금과 유동자산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똑같은 상황은 기본적으로 어떤 은행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

돈을 맡긴 모든 고객에게 즉각 돈을 내줄 수 있을 만큼의 유동성을 보유한 은행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은행들과 달리 도이체방크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주가가 올해 들어 55% 떨어지면서 고객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먼 브러더스가 취약했던 이유는 단기자금시장과 헤지펀드들에 과도하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헤지펀드들이 맡긴 수십억 달러의 현금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단기자금은 만기가 연장되지 않았고, 거래상대방은 파생상품 거래에 추가 보증금을 요구했다.

도이체방크는 이와 다르게 훨씬 다양한 고객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 소매고객부터 독일 안팎의 기업고객까지 다양하다.

도이체방크는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도 2분기 말 현재 전체자산의 12%, 2천468억 달러(약 272조5천억원)에 이를 정도로 풍부하다.

리먼 브러더스가 보유했던 유동자산은 파산 한 달 전 전체자산의 7.5%, 450억 달러(약 50조원)에 불과했다.

게다가 도이체방크는 필요하면 ECB에서 1조8천억 유로(2천221조원)로 평가되는 장부상 자산을 담보로 거의 0%에 가까운 금리로 현금을 끌어올 수 있다.

리먼 브러더스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로부터 건실한 담보가 없다며 대출을 거절당한 바 있다.

하지만 도이체방크가 그렇다고 면역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객이나 예금자들의 신뢰를 잃는다면, 아무리 유동성이 풍부해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 도이체방크 사태의 끝은…"유상증자·정부 지분인수 가능성"
도이체방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된 리먼 브러더스와는 처지가 다르지만, 만약 실제로 파산에 이르게 될 경우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미칠 충격은 훨씬 더 클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파국에 이르기 전에 독일 정부가 지분인수 등의 형태로 사태를 무마할 가능성이 크며, 부족한 자본을 메우려고 자산 매각과 유상증자 나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2008∼2014년 세계 3대 투자은행 안에 들었던 도이체방크는 작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68억 유로(약 8조4천억원)의 적자를 내면서 5위로 추락했다.

도이체방크는 지난 8월에는 유럽의 우량주 지수인 Stoxx 50지수에서 제외되는 불명예까지 얻었다.

올해 들어서도 상반기 매출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21%, 순이익은 83% 감소했다.

도이체방크는 앞으로도 마이너스 금리와 경쟁 심화로 수익 감소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과징금 부담에 따라 실적 악화가 불가피해 자본확충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파생상품 거래 노출도가 큰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작년 말 현재 파생상품에 대한 위험노출액은 46조 유로(5경6천761조원)에 달한다.

이는 전체 이자율 파생시장의 10%가량으로 JP모건체이스나 씨티그룹보다 많다.

앞으로 다음달 27일로 예정된 3분기 실적발표나 미국 법무부의 RMBS 부실판매에 대한 벌금 확정 등을 계기로 도이체방크 사태의 국면이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헤지펀드들에 이어 BNP파리바나 HSBC와 같은 주요 투자은행(IB)들이 거래를 중단할 경우 사태는 더욱 악화될 수 있다.

리자 암브라모비치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있어서 도이체방크의 중요성은 과장할 수 없을 정도다"면서 "IMF가 글로벌 금융시스템에서 가장 큰 위험기관으로 지목한 데서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랜시스 코폴스 칼럼니스트는 포브스에 기고한 글에서 "도이체방크는 리먼 브러더스보다 훨씬 크고 글로벌 금융시스템과 서로 훨씬 더 속속들이 연결돼 있다"고 지적했다.

NH투자증권 한광열 애널리스트는 "상환일정과 유동성 등을 보면 도이체방크가 선순위 채권 등에 대해 이자나 원금지급을 하지 못해 디폴트를 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 "유럽은행의 수익성이 계속 안 좋아지고 있고, 도이체방크는 파생상품 위험노출액도 많아 시스템리스크로 전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에 이르려면 디폴트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도이체방크는 다른 은행에 비해 자본비율이 낮기 때문에 증자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주가가 낮은 상황에서 주주가치를 갉아먹는 일이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면서 "독일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까지 간다면, 코메르츠방크와 비슷한 수준인 20%가량의 비율로 지분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국제금융센터 김위대 유럽팀장은 "도이체방크는 자본비율이나 투자자산 비율이 상당히 양호해 재무건전성 측면에서 아직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라면서 "현금유동성도 풍부하고 언제든지 ECB로부터 0%대의 금리로 자금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이 율 기자 yulsi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