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모기업이나 계열회사의 자금 지원 가능성 등을 배제한 해당 기업 본연의 신용등급(자체신용등급 또는 독자신용등급)이 시장에 공개된다. 투자자 등 제3자가 특정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를 의뢰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금융위원회는 21일 이 같은 내용의 ‘신용평가 신뢰제고를 위한 시장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신용평가 정보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고 신용평가 업체와 기업의 유착 가능성을 낮춰 ‘늑장 등급조정’ 등 신용평가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모기업 방패막 걷어낸 '자체신용등급' 공개
어떻게 신뢰도 높이나

자체신용등급은 특정 회사의 자체적인 채무상환 가능성만을 고려한 순수한 신용등급이다. 모회사 등 계열사나 정부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의 투자위험을 나타낸다. 2012년부터 도입이 추진됐지만 기업 부담 등을 감안해 미뤄졌다.

신용평가 업체들은 앞으로 계열사 지원 가능성을 포함한 최종신용등급뿐 아니라 이 같은 자체신용등급도 신용평가보고서에 공개해야 한다. ‘자체신용등급은 A-이지만 모기업의 지원 가능성을 고려해 한 단계 상향한 A로 조정’ 등의 문구를 보고서에 서술하는 식이다. 내년에 시중은행 등 민간 금융회사부터 먼저 시행하고 2018년부터 일반 기업으로 범위가 확대된다.

자체신용등급이 도입되면 투자자들이 특정 기업에 대한 위험분석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으로 금융위는 보고 있다. KT그룹 계열사인 ‘KT ENS(현 KT이엔지코어) 사태’와 같은 혼란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KT ENS는 2014년 대규모 사기 대출에 연루돼 수익성이 악화됐지만 KT의 지원 가능성이 반영돼 신용등급 ‘A’를 유지했다. 하지만 KT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시장에 적잖은 혼란을 초래했다. 경제계는 자체신용등급 도입이 재무구조가 나쁜 일부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업계 내 공정경쟁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3자 의뢰평가’ ‘신용평가사 선정 신청제’를 도입해 신용평가 업체가 기업에 종속되는 문제도 개선하기로 했다. 지금은 기업이 신용평가 업체에 수수료를 내는 고객이다 보니 기업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해당 기업에 유리한 신용등급을 매기는 경향이 있다는 게 시장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해 말 기준 신용등급 보유업체의 90%가 투자등급(AAA~BBB)에 몰려 있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3자 의뢰평가는 연기금, 증권사 등 회사채 투자자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신용평가를 의뢰하는 제도다. 투자자는 객관적인 신용평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시장 전체적으로는 등급의 적정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또 금융감독원 등에 신평사 선정을 위임한 기업은 신용평가를 한 곳에서만 받을 수 있도록 (현행은 의무적으로 복수평가를 받아야 함) 혜택을 줘 신평사 선정 신청제를 활성화할 방침이다.

제4 신평사 인가는 일단 유보

신평사에 대한 감독과 제재는 대폭 강화한다.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나이스신용평가 등 세 개 회사가 신용평가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데 따른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인가 취소 등 강경책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금감원의 시행세칙을 개정해 등급을 담합하거나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신용등급을 이용하는 등 불건전 영업행위를 한 신평사는 인가 취소까지 할 수 있도록 제재 수위를 높인다. 또 평가조직과 영업조직을 분리하지 않는 등 이해상충 방지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신평사는 최대 영업정지에 해당하는 조치를 하기로 했다.

신평사에 대한 금감원의 상시검사도 이뤄진다. 그동안에는 동양사태 등 대규모 신용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검사를 했지만 내년부터는 매년 취약부문에 대한 테마를 선정해 수시로 검사한다. 신평사가 제대로 된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도 평가해 연 2회 공개하고 투자자 손실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도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반영할 방침이다.

회사채 시장의 관심이 집중됐던 ‘제4 신평사’ 허용 문제는 중장기 과제로 돌리기로 했다. 김태현 자본시장국장은 “현재 시장구조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새 신평사 진입에 따른 경쟁으로 인한 부실평가, 등급인플레 등 부작용이 더 클 것으로 우려된다”며 “신규 진입을 위한 시장여건이 확보됐는지 주기적으로 점검하면서 허용 여부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