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틀에 갇힌 대학들
학제간 교육 위한 '겸임교수제', 서울대 컴퓨터학부엔 1명 불과
'자리 뺏길라'…타학문에 폐쇄적
논문도 창의성보단 양만 중시
학문융합이 중복연구로 오해도
창의인재 유출 심각
"한국선 연구 막혀"…해외로 이탈
서울 대학 전임교원 감소 지속
정부 규제 완화·관행 개선 시급
안에서 곪는 대학
한국 대학에선 융합의 기초인 학제 간 융·복합 교육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울대는 2008년부터 교수 한 명이 두 개 이상의 단과대에 소속돼 강의할 수 있는 ‘겸무교수제’를 시행 중이지만 유명무실한 제도가 돼버렸다. 컴퓨터공학부만 해도 교수 34명 가운데 겸무교수는 한 명뿐이다. 연세대 고려대 등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 대학은 다르다. 스탠퍼드대 컴퓨터공학부는 교수 77명 중 20명이 다른 학부에 소속된 겸무교수다. 예를 들어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언어학과 학과장인데 컴퓨터공학도 가르친다.
한국 대학은 학제 간 연구를 위한 토양도 척박하다. 장래혁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가 지난해 12월 KAIST 전기공학부로 옮긴 게 대표적인 사례다. 장 교수는 국제컴퓨터학회가 인정한 ‘석학 회원’으로 전기공학과의 융합연구를 희망했지만 학과 간 장벽에 막혀 이직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의 한 노(老)교수는 “학계에선 학제 간 융·복합을 ‘우리 과(科) 자리 뺏기’로 생각한다”며 “다른 학문에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학계 문화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융합연구는 정부출연기관들로부터 연구비를 탈 때도 불리하다. 산업표준분류표에 속하지 않은 학문 영역은 연구비 신청 자체가 어렵다. 포스텍의 A교수는 “새로운 융합연구는 아예 연구코드가 없어 ‘기타’ 항목으로 신청해야 할 때가 많다”며 “억지로 기존 틀에 연구주제를 맞춰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하소연했다.
평가자들이 전문성보다는 객관성만 강조하는 것도 융합연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지목된다. 장병탁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그동안 논문을 얼마나 썼는지 등 양적 지표를 중요시하다 보니 학제 간 연구 등 새로운 시도는 홀대받기 일쑤”라고 했다. 중복연구금지 조항에 걸릴 때도 있다. 기존에 있는 학문연구들을 연결하는 연구가 중복연구로 오해받는 일이 적지 않다.
돌아오지 않는 유학생
고급 두뇌들의 해외 유출도 심각하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미국 주요 대학 이공계에 한인 교수 한 명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라며 “최근 10년 새 벌어진 일”이라고 지적했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에서 만난 서영석 씨(네트워크보안 관련 박사과정)는 “학제 간 연구가 필요한 분야인데 한국에선 배울 수 있는 교수가 없다”며 “귀국해도 교수직 자리를 얻기는 힘들다”고 했다.
최근 5년간 서울 소재 대학의 전임교원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2012년 5만4246명에서 지난달 말 기준 5만695명으로 감소(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자료)했다. 싱가포르난양공대 미디어랩에서 연구 중인 정연보 교수는 “한국에서는 1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 교수가 드문 것도 문제”라며 “싱가포르만 해도 연봉으로 수억원을 받는 교수가 꽤 많다”고 전했다.
학계에선 정부가 대학 예산까지 통제하는 등 지나친 간섭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장래혁 교수는 “대학이 교수 한 명 맘대로 뽑지 못하고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등록금을 올리려고 해도 정부가 일일이 규제한다”며 “교수 정원이 정해져 있으니 제로섬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전국 사립대 교수 협의체인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의 박순준 이사장(동의대 교수)은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대학 개혁도 문제”라며 “경쟁력 없는 대학의 퇴출은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취리히(스위스)=박동휘/황정환/임기훈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