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4조 지원 결정했지만 관련문서 없어…책임회피 수단 전락

서별관회의(경제현안회의)를 둘러싼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이 대우조선해양 지원을 결정한 서별관회의에서 자신이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폭로한 이후 밀실 행정의 적절성과 책임성 문제를 두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란이 거세다.

홍 전 회장의 폭로 인터뷰 이후 우리 정부가 37억달러가 넘는 분담금을 내고 어렵게 따낸 국제기구 부총재 자리가 사실상 사라지는 등 충격의 여파가 국외로까지 미치는 모습이다.

정부는 대우조선에 대한 4조2천억원 지원 결정이 경제상황 및 금융시장 파장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항변하지만, 결정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불투명하게 이뤄진 결정과정 자체에 비판의 시각이 집중되고 있다.

국민 부담으로 충당해야 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의 투입을 사실상 결정짓는 최고의사 결정권자들의 회의였음에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그에 걸맞은 투명성과 책임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참석자들은 서별관회의가 정식 의사결정에 앞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비공식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애써 의미를 축소하고 있지만, 야당이 공개한 대우조선 관련 서별관회의 문건을 보면 서별관회의가 단순한 이야기 모임이 아닌 사실상 공식 회의체 수준의 회의였음을 미뤄 짐작케 한다.

전문가들은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라면 논의 내용을 기록해 추후 공개토록 하는 방식으로 정책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 개발독재시대 '녹실회의'가 시초…최고 실세들이 주요 정책 결정

서별관회의는 청와대 서쪽 별관에서 열리는 회의다.

주로 거시 경제와 금융시장에 관한 경제 현안을 다룬다.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위원장이 주요 멤버다.

사안에 따라 한국은행 총재, 금융감독원장, 관련 부처 장관, 국책은행 등 공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참여한다.

참석자 면면을 보면 서별관회의는 의사 결정체가 아니라 격의 없는 논의를 위한 회의체라는 정부의 해명이 강변으로 보인다.

서별관회의의 기원은 개발독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1967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던 고 장기영 씨가 경제부처 장관들과 현안을 논의했던 '녹실(錄室) 회의'를 서별관회의의 시초로 볼 수 있다.

당시 회의 장소였던 경제기획원 접견실 소파와 카펫이 녹색이라서 '녹실 회의'로 불렸다.

녹실회의는 김영삼 정부인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서별관회의로 부활한다.

이후 김대중 정부,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까지 주요 경제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서별관회의를 이용했다.

대우차·하이닉스 등 대기업의 빅딜, 제일은행 등 은행 구조조정, 2000년대 초반의 카드 사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한국 경제의 방향을 바꾼 수많은 현안이 서별관회의를 거쳐 갔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발언 등을 담은 회의록이나 의사록은 만들지 않는다.

회의 자료도 회의가 끝나면 모두 거두어간다.

비공식 회의체여서 회의 참석자도 회의를 부인하는 희극도 벌어졌다.

2013년 최수현 당시 금감원장은 국정감사에서 서별관회의에서 동양그룹 사태 대책을 논의했다는 질의에 "그런 적 없다"고 부인했다가 의원들이 자료로 반박하자 뒤늦게 시인했던 적이 있다.

동양그룹 사태는 자금난에 몰린 동양이 개인 투자자들에게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불완전 판매해 거액의 피해를 유발한 사건이다.

◇ 안건자료 도로 거둬가고 기록도 안 남겨…관치금융의 적폐

최 전 금감원장의 국회 발언 이후 3년 만에 홍 전 산업은행 회장의 언론 인터뷰로 서별관회의를 둘러싼 논란은 다시 일파만파 확산되는 모습이다.

홍 전 회장은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우조선에 대한 지원이 서별관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됐으며 자신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대우조선해양의 부실 경영에 대한 산은 책임론을 면하기 위한 변명 차원이었지만, 이는 밀실에서 이뤄지는 '관치금융'의 실상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22일 서별관회의에서 안건으로 다룬 '대우조선 정상화 지원방안' 문건을 공개하면서 홍 전 회장의 발언이 틀린 말이 아님을 보여줬다.

금융위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건은 법정관리 선택 시 수출입은행의 건전성이 심각하게 추락하게 되므로 4조2천억원을 긴급 지원해 대우조선을 정상 기업처럼 만들고, 이와 관련한 행위는 면책해 준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한 주 뒤 산업은행이 발표한 대우조선 정상화 방안이 이 문건의 결론을 그대로 옮겨온 것은 서별관회의가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 기구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지난달 29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야당 의원들이 임종룡 위원장을 상대로 서별관회의의 실체를 밝히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임 위원장은 "서별관회의는 (특정 사안에 대한 결정에 앞서) 사전적으로, 비공개로 협의하는 의사결정 과정"이라며 "비공식 회의는 회의록을 남기지 않는 게 대개 관행이지 않느냐"고 회의의 의미를 축소했다.

임 위원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한국 조선업 구조조정을 지켜보고 있다"며 통상마찰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나 홍 의원이 공개한 서별관회의 문건을 보면 정부 각 부처와 관계기관 등이 작성에 관여한 데다 대우조선 정상화 방안에 관한 소상한 시나리오별 분석이 나와 있다는 점에서 논의 안건이 단순히 소파에 모여앉은 채 비공식적으로 다룰 수준을 넘어선 것임을 알 수 있다.

비공식 밀실행정의 후유증은 본의 아니게 국외로까지 번지는 모습이다.

홍 전 산업은행 회장의 서별관회의 폭로에다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른 책임론이 부각되자 중국 측은 홍 전 회장이 맡았던 AIIB 부총재 자리를 국장급으로 강등했다.

37억 달러가 넘는 분담금을 내고 어렵게 따낸 부총재 자리를 밀실행정의 후유증으로 한순간에 잃게 된 것이다.

◇ "추후 회의내용 공개해 책임성 강화해야"

기업 구조조정 과정을 조율할 정부기관 간 협의체나 서별관회의 같은 비공개회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당수 전문가도 인정한다.

그러나 서별관회의든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든 회의내용을 좀 더 투명하게 공개해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상의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회의라면 추후 공개되는 방식으로 회의록을 남기는 등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문제는 서별관회의 자체가 아니라 회의에 공식적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며 "누가 의사결정을 했는지 드러내고, 추후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회의내용을 문서 기록으로 남겨 일정 기간이 지난 이후 감사원과 국회가 의사결정의 적정성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별관회의의 대안으로 법률에 근거를 둔 새로운 협의회를 신설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한국금융학회장)는 지난 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전면 재검토를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기획재정부, 민간 금융감독기구,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가 참여해 시스템적인 위험이 발생할 우려를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방식의 금융안정협의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명예교수)도 서별관회의 내용을 기록해 3∼6개월 뒤 공개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정책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논란이 불거지자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일 열린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꼭 필요하다면 앞으로는 회의록을 작성하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서별관회의는 지난 6월 6일 마지막으로 열리고서 홍기택 전 산업은행 총재의 인터뷰 파문을 계기로 한 달 이상 열리지 않고 있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이후 국제금융시장이 출렁일 때도 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연합뉴스) 이상원 이지헌 박초롱 기자 p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