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칼럼] 원유 고급화에 한국낙농 길 있다
국내 낙농업이 장기 불황의 터널을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원유의 공급 과잉과 우유·유제품 소비 감소로 낙농가와 유업체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잇따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유제품 수입까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 30년간 시행해오던 원유의 생산쿼터제를 지난해 4월 전면 폐지함에 따라 유럽산 유제품 공세는 더 거세질 전망이다. 낙농여건이 취약해 원천적으로 가격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국내 낙농산업의 활로가 안 보인다.

국내 원유시장은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국민 1인당 유제품 연간 소비량은 2010년 64.2㎏에서 2015년 75.7㎏으로 크게 늘었지만 유제품 수입 증가로 국내 원유 자급률은 2010년 64.7%에서 2015년에는 54.7%로 크게 하락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일부 소비자의 수입품 선호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유제품을 구매할 때도 가격 대비 품질을 따지기 시작한 소비자들이 수입품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 한 요인으로 꼽힌다. 낙농선진국과 비교해 원유 생산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국내의 불리한 낙농여건에서 국내산 유제품은 수입품보다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낙농선진국과의 FTA 체결 과정에서 일정 물량에 0% 관세를 적용하는 무관세쿼터(TRQ)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면서 수입품의 공습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국내 낙농산업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해 국산 유제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것만이 최선이다. 낙농가는 더욱 안전한 원유를 생산하면서 생산비를 낮추고, 유가공업체는 가공비를 최소화하면서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품질의 국산 유제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 소비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국산 명품 유제품을 개발, 보급하는 수밖에 없다.

세균 수에 기준한 국산 원유의 품질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원유의 위생등급은 세균 수와 체세포 수 검사결과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런 위생등급제도는 세계적으로 똑같다. 한국은 그동안 낙농선진국과 비교해 세균 수에 비해 체세포 수에는 다소 관대했다. 원유에서 체세포 수가 가지는 의미는 여러가지인데, 건강하고 스트레스가 적은 젖소에서 생산된 원유일수록 체세포 수가 적다. 체세포 수가 적은 원유일수록 인체에 유익한 성분이 많이 포함돼 있고, 풍미나 품질을 떨어뜨리는 성분이 적어 제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진다.

하지만 체세포 수를 줄이고 낮게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별 목장에서부터 부단한 젖소 건강관리 노력이 필요하며, 유가공업체는 이런 고품질의 원유를 이용해 차별화된 유제품 생산과 공급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얼마 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이 큰 화제가 됐다. 바둑은 간단하게 말하면 집을 많이 지은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인데, 대국 초반에 중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고자 돌을 배치해 대형을 갖추는 포석(布石)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바둑에서 기초 작업이 탄탄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듯이 국내 낙농산업도 우유와 유제품의 본질이자 뿌리인 ‘원유’의 품질 향상에 집중해야 한다. 동시에 그런 원유를 사용해 신선하고 안전한 명품 제품을 생산해 글로벌 경쟁에 대응해야 한다. 국내 낙농산업의 경쟁력을 지키는 것은 저가의 물량공세가 아니라 고품질의 신선하고 안전한, 소비자가 선호하는 차별화된 명품 유제품을 생산, 공급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박종수 < 충남대 명예교수·동물자원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