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두보의 무념무상
“강가 정자에 엎드리니 배 따뜻하고, 들판을 내다보며 노래를 한다. 물 흐르니 마음 다툼 없고, 구름 떠 있으니 뜻 함께 더뎌라! 장차 봄은 저물려는데 만물은 저마다의 삶을 즐기네. 고향은 간다 간다 못 돌아가니 시름 밀어내려 억지로 시를 짓네(坦腹江亭暖 長吟野望時 水流心不競 雲在意俱遲 寂寂春將晩 欣欣物自私 故林歸未得 排悶强裁詩).”

두보의 강정(江亭)이란 시다. 시인은 화창한 봄날에 강가의 정자 마루에 엎드려서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봄볕에 데워진 마루의 온기가 복부에 전해지자 노래를 한 곡조 한다. 주변의 자연은 평화롭고 각자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평온하고 배 따뜻하니 행복이 따로 없다.

그러나 이 시는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두보가 쓰촨성으로 이주했던 시절의 작품이다. 피란 생활의 어려움도 시인의 낙천적인 성격을 어찌하지 못한다. 시인은 봄 풍경에 그대로 빠져들고 있다.

인간사는 전란으로 시끄러워도 자연의 질서는 어김이 없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게 돼 있다. 그래서 유가에선 자연을 본받아 “군자는 굳세고 쉬지 않아야 한다(君子而自彊不息, 주역 건위천)”며 성실을 강조한다.

특히 물은 소통을 잘한다. 그러니 다툼이 있을 리 없다. 이쪽으로 가라하면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라하면 저쪽으로 간다. 그렇다고 영혼이나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래로 흐른다는 방향성을 잊지 않고 있다. 큰 원칙을 지키면서 주위와 조화를 이루며 한발 한발 앞으로 가고 있다.

유유자적하는 구름을 보면 아집을 버리게 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거나 이 사업을 언제까지 끝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진다. 다음 사람이 천천히 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기 직전에 후계자를 지정해 달라는 신하들의 요청에 “가장 강한 자”란 한마디만을 남겼다. 후계자를 지정해서 자기 체제를 구축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죽기 직전에 깨달았을까.

이렇게 봄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봄이 저문다는 느낌이 든다. 동시에 고향에 대한 갖가지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참 철이 없구나! 봄을 즐길 때가 아닌데.” 그러나 이 전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빠야 고향이나 부모 형제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시인에게 가장 바쁜 행위는 시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시름을 덜기 위해 시에 몰두해 본다. 바쁘게 일하는 것이 바로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편인지 모른다. 우리도 일에 몰두해 보자.

김상규 < 감사원 감사위원 thankyou61@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