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해외에 투자할 때 국내 증권사나 운용사는 끼워 주지도 않습니다. ‘국내 금융시장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기금운용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지난해 말 미국 뉴욕에서 만난 국내 A증권사의 해외대체투자 담당 임원은 울분을 토했다. 그는 한국 기관투자가들이 선호할 만한 인프라 대출펀드를 찾으러 뉴욕을 방문한 참이었다. 이날 하루에만 5개 운용사 관계자를 만났다는 그는 “군인공제회나 교직원공제회의 위험감수 성향과 목표수익률에 맞는 대체투자 상품을 찾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해외 대체투자자산만 30조원에 달하는 한국의 최대 ‘큰손’ 국민연금은 그의 고객이 아니다. “국민연금은 해외에 투자할 때 철저히 해외 증권사나 운용사만 쓰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아요.”

국내 한 증권사는 몇 년 전 미국 물류창고 투자건을 들고 국민연금을 찾았다가 ‘퇴짜’를 맞았다. “미국 현지 운용사와 직접 거래하면 되는데 한국 증권사를 끼워 주면 이중으로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게 투자 거부의 논리였다. 이 증권사 관계자는 “해외 운용사들에는 1년에 5000억원씩 위탁수수료를 지급하면서 국내 증권사나 운용사에는 수수료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얘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국민연금의 국내 운용사 배제는 고집스러울 정도다. 2009년 세계 최대 사모펀드(PEF)인 블랙스톤은 우리은행 계열 사모펀드인 우리PE와 함께 ‘우리블랙스톤PE’라는 펀드를 국내에 공동 설립했다. 그러자 국민연금 해외대체투자실은 그해 블랙스톤 뉴욕 본사가 모집한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펀드에 출자를 거부했다. 우리블랙스톤PE에 투자한 국내대체투자실과 ‘교통정리’가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투자공사(CIC)는 블랙스톤이 중국에 투자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회사(SPC)에 함께 출자하고 블랙스톤 본사에 지분 투자까지 했다”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국내 운용사를 배제하는 국민연금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말했다.

허물어지는 'GP-LP' 갑을관계

국내 자본시장에서 ‘울트라 갑’으로 평가받는 국민연금도 실력 있는 해외 펀드 운용사를 고르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민연금의 투자 의향을 정중하게 거절한 운용사도 꽤 있다. 운용사(GP)와 펀드투자자(LP)의 전통적인 ‘갑을관계’가 역전되는 순간이다.

GP는 법적으로 펀드 운용 결과에 모든 책임을 지는 무한책임사원(general partner)을, LP는 투자 금액만큼의 권한과 책임을 행사하는 유한책임사원(limited partner)을 말한다. 통상 투자금을 분배하는 LP가 ‘갑’의 지위를, 자금을 유치하는 GP는 ‘을’의 지위를 갖는다. 하지만 저금리로 시중 유동성이 풍부해지고 투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실력 있는 운용사의 지위가 LP보다 높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만큼 ‘큰손’들이 돈을 굴릴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의미다. 국내 사모펀드(PEF) 관련 법률은 GP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LP가 펀드 운용 업무에 관여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고 있다.

뉴욕=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