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고 정주영 회장이 생각난다
경제가 어렵다. 금년에 3% 성장도 어려울 것 같다. 내년 이후 전망도 불투명하다. 경제 난국을 타개할 기업가 정신이 절실한 시점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고(故) 정주영 회장이 생각나는 이유다.

“열악한 환경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정 회장의 면모는 그 누구보다도 빛나는 특성을 가진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있었기에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되고 제조업 강국 소리를 듣게 됐다.

정 회장이 생전에 보여준 기업가 정신이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삶 자체가 ‘인간 승리’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원도 송전보통학교 졸업장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다. 건설현장과 부두하역 막노동꾼, 쌀 배달 점원을 거쳐 노점 미곡상을 개업했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을 세웠다. 존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가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새로 썼다면 그는 한국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다.

둘째, 도전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출한 점이다. 1965년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로 해외 진출의 첫발을 내디뎠다. 1967년 일본 기술진의 반대를 물리치고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바꿔 저비용으로 소양강댐을 완공했다. 조선소 완공 전에 그리스 선주로부터 26만t급 대형 선박을 수주한 것도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화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 건설 수주야말로 불굴의 의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돈을 벌려면 세계의 돈이 몰리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낮은 입찰가와 공기 단축으로 건설 한국의 입지를 구축했다. “이봐, 해봤어? 해보지도 않고 고민하느라 시간과 돈 낭비하지 말고 한번 해봐.” 1983년 그가 서산 간척지 건설현장에서 던진 불호령이다.

셋째, 그 없이는 한국의 제조업 발전을 논할 수 없다. 19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진출 선언 이후 경제의 질적 전환이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소 건설과 함께 자동차산업에 올인했다. 고유 모델 개발과 미국 시장 진출이 성장의 키워드였다. “자동차산업은 선진 공업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며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출시했다. 미국 진출 역시 글로벌 현대를 위한 야심찬 행보였다. 현대의 자동차 고유 모델 개발은 포항제철 건설, 삼성 반도체 진출과 더불어 한국 제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린 3대 쾌거였다.

경영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조직에 영감을 불어넣는 능력일 것이다. 구성원들이 열정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무섭게 돌진하는 ‘현대 스타일’을 창출했다. 불 같은 추진력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반전시키는 마법을 발휘했다. 그의 카리스마에 끌려 많은 인재가 몰려들었다. 이춘림, 이내흔, 이명박 등이 현대사관학교가 배출한 대표적인 최고경영자다. 그가 뿌리내린 실력 위주의 인사원칙 때문이었다. 비즈니스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영감을 주는 능력이라는 니틴 노리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장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장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직관은 또 다른 핵심 요소다. 임원들이 반대하는 중동 진출을 밀어붙인 것이나 일본을 누르고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켜 바덴바덴의 감동을 연출한 것도 뛰어난 직관력 덕분이었다.

1998년 소떼 방북이야말로 승부사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방북은 민족의 한을 풀어준 쾌거였고 지구촌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사회학자 기 소르망의 말처럼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었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순간도 있었다. 1992년 국민당 창당과 대통령 선거 출마는 실패한 외도였다. 대선 패배는 그와 현대그룹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말년의 ‘왕자의 난’ 역시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었다.

타임지는 그를 ‘아시아의 영웅’으로,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경제의 나폴레옹’으로 선정한 바 있다. 창업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기업인(起業人)이었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이었다. 무엇보다도 잔정 많은 질박한 인간이었다.

박종구 < 초당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