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은행 업무 축소…남는 역량은 산업구조조정에 집중
산은은 중견기업, 기은은 초기기업 지원으로 역할 분담

금융위원회가 1일 발표한 '기업은행·산업은행 역할 강화' 방안은 민간 금융사와 중첩되는 업무영역을 최소화하면서 민간 부문을 보완해 창의력과 기술력을 가진 기업의 성장단계별 금융지원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산업은행(산은)은 중점 지원분야를 전통 주력산업에서 미래성장동력 산업으로 전환하고, 지원 대상도 대기업보다는 중견기업이나 예비 중견기업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또 민간과의 시장마찰을 일으킨다는 비판을 받은 투자은행(IB) 업무를 대폭 축소하는 대신 그에 따른 유휴 인력을 기업 구조조정이나 리스크 관리 부문으로 돌리기로 했다.

기업은행(기은)은 창업기업이나 성장초기 기업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금융 역할을 강화하기로 했다.

기능 개편안은 당장 이들 은행의 연말 업무계획에 반영돼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 산은 핵심 기능, 돌고돌아 다시 정책금융 강화

금융위가 이번에 발표한 정책금융 기능 재편안은 산은·기은 역할 강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대부분 개편 내용은 산은의 기능 재조정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산은의 대폭적인 기능 재조정은 사실상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에 산은의 민영화 방침을 밝히고 정책금융 역할을 따로 떼내 정책금융공사를 출범시켰다.

정책금융 기능이 분리된 산은을 글로벌 IB로 육성한다는 기조 아래 IB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개인금융 업무에까지 손을 뻗어 민간 금융사들과 경쟁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산은 민영화는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산은은 2013년 8월 정책금융 역할 재정립 방안에 따라 정책금융공사와 재통합하는 진통을 겪었다.

올해 1월 통합 산은이 재출범했지만 민간과 시장마찰을 일으킨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 재정립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이번 개편안이 마련됐다.

그러나 정부의 오락가락한 정책으로 산은 내부 일각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또 민영화를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우려가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정부로서는 조변석개(朝變夕改)식 정책금융 개편으로 불필요한 혼란과 비용만 유발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 중견기업 육성·지원 강화에 방점…'피터팬 증후군' 방지

이번 산은 기능 개편안의 핵심은 정책금융기관 간의 중첩된 역할 재조정과 민간과의 마찰 최소화이다.

우선 기은이나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등 다른 정책금융과의 기능 중첩을 피하기 위해 산은은 기업 성장단계 가운데 중견기업 육성과 지원 강화에 방점을 두기로 했다.

예비 중견기업을 중견기업으로 육성하는 역할도 강화한다.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이 각종 정책혜택이 많은 중소기업에 계속 머물고자 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막겠다는 취지다.

중견기업 지원 및 육성에 투입되는 자금은 2014년 21조6천억원에서 2018년 30조원으로 늘리고, 전체 지원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35%에서 50%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창업기업이나 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도 어느 정도 유지하는 대신 온렌딩(간접대출)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현재 82개에 불과한 지점 영업망으론 소규모 기업 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에서다.

창업·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기능은 직접투자보다 간접투자 방식을 강화하기로 했다.

엔젤투자자나 벤처캐피털, 성장사다리펀드 등과 협업해 공동투자나 간접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모험자본 생태계의 활성화를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성장기업 활성화 인수합병(M&A) 펀드를 4천억원 규모로 조성하고, 모험자본의 투자회수 및 재투자를 지원하는 '세컨더리펀드'를 2천억원 규모로 만들기로 했다.

직접투자를 하는 경우에는 후행투자가 지속될 수 있도록 성장단계별 시리즈 투자 방식으로 지원키로 했다.

◇ IB 업무 대폭 축소…민간역할 부족한 영역은 보강

산은의 IB 부문은 대폭 축소하되 산업구조조정 개편 촉진 기능은 강화하기로 했다.

민간과의 시장 마찰을 최소화하면서도 산은 고유의 정책금융 기능을 유지·확대하겠다는 취지다.

회사채 발행 주관 업무는 민간과 경쟁하는 우량(AA등급 이상) 회사채의 발행 주관을 축소한다.

하지만 해외 채권 발행, 비거주자 회사채 발행, 기간산업 지원용 장기채 발행 등 민간사 역할이 미흡한 부문에는 역량을 더 쏟아붓기로 했다.

M&A 자문의 경우 국내 IB가 충분히 역량을 갖춘 중소형 M&A 자문에는 앞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은이 주채권은행 역할을 맡거나 대기업 사업재편과 같은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문은 계속 유지 또는 강화하기로 했다.

사모펀드(PEF) 부문에선 미래성장동력이나 산업구조조정 촉진을 중심으로 개편하고, 민간 중소형 운용사와 경합하는 2천억원 이하 규모의 펀드 조성을 지양하기로 했다.

프로젝트파이낸스(PF) 부문에선 상업적 목적의 일반 부동산 개발사업 참여를 줄이는 대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 국제기구와 협력이 필요한 해외 PF 참여를 15억 달러 수준으로 확대키로 했다.

IB 부문 축소로 발생한 유휴 인력은 기업 구조조정과 리스크심사 강화, 미래성장동력 지원 업무 강화에 투입된다.

◇ 기은은 창업·성장초기 기업에 집중

성장산업에 자원이 더욱 효율적으로 배분되도록 하는 산업구조개편에 대한 역할은 산은과 기은 모두 강화한다.

조선, 해운, 건설, 석유화학, 철강 등과 같은 전통적인 경기 민감 산업에 대한 대출은 재점검하는 한편 미래성장동령 산업에 대한 지원은 두 은행 모두 늘리기로 했다.

미래성장동력 기업에 대한 자금을 우선적으로 배분하고, 미래성장동력 기술의 사업화 촉진을 위해 기술거래 활성화를 지원하는 방향이다.

산업은행이 이미 개설 중인 기술거래플랫폼(기술거래마트)은 운영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경기민감 산업은 기존 대출을 재점검하고 한계기업은 수시평가를 통해 선제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기업 정상화 가능성을 엄정히 판단해 신속한 구조조정도 펼치기로 했다.

산업은행이 중견기업 지원에 집중하는 한편 기업은행은 창업·성장 단계에 있는 기업에 대한 역할을 지금보다 강화하고 현재 전체 지원비중의 0.6%에 불과한 투자 기능을 보강해 중소기업의 자본시장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기은의 창업·성장초기 기업에 대한 지원금은 2014년 기준 연간 9조1천억원에서 2018년에는 15조원(전체 지원비중의 30.0%)으로 늘어난다.

기은은 또 자회사인 IBK투자증권을 '중기특화 증권사'로 육성해 성장기업의 상장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밖에 산은은 '기업금융나들목'(정책금융포럼)에 대한 정책금융기관의 참여를 늘리고 기은은 '기업투자정보마당(가칭)'(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구축해 기업투자에 대한 정보를 원활하게 제공하기로 했다.

손병두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정책금융기관의 개혁을 통해 기업의 성장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장실패를 적극적으로 보완하고 미래성장 동력을 발굴해 금융과 실물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이지헌 기자 pan@yna.co.kr